여행이라는 것은 나에게 추억을 저축해주고 창작력을 제공해주는 영감의 바다인 것 같다. 예술이라는 화두를 항상 지속해야 하는 일상의 삶에 지치고 무기력할 때마다 돌파구를 찾는 게 독서와 여행이다.

그래서 명말 화가이자 회화이론가인 동기창 선생은 독서 만권과 여행 만리를 통해 예술의 성취가 가능하다고 역설했나 보다. 특히 여행은 직접 경험이 쌓이고 겹치는 시간의 축적을 통해 예술의 세계를 풍성하게 해주는 활력소 역할을 한다.

경남 합천 황매산은 나에게 ‘엘도라도’로 각인돼 있다. 오지였던 그곳에 간 것은 20년 전이다. 결혼하고 광주에 정착하면서 주말만 되면 차를 몰고 아름다운 산천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닐 때였다. 산 모양들이 거의 비슷하고 고만고만하다 느끼며 여행을 다녔는데, 가끔 익숙지 않은 풍경에 갑자기 부딪쳐 시각적 충격을 받을 때가 있었다.

그중의 하나가 황매산과의 조우였다. 해인사를 지날 때, 근처에 숨어있는 폐사지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산과 내를 넘나들면서 힘들게 찾아갔다. 거기에 도착한 순간 영암사라는 황량한 옛 절터를 감싸고 있는 커다란 화강암 덩어리들을 보았다. 이글이글 빛나면서 위용을 과시하고 있는 그것이 황매산이었다. 바위덩어리들로 이루어진 봉우리는 모산재라고도 하며 신령스러운 바위라는 의미로 영암산이라고도 했다. 모산봉이 아닌 모산재로 명명한 것도 특이했다.

그 광경은 무척 아름다웠지만 기묘하고 독특해서 우리 산천에서 보기 힘든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유년 시절 강한 인상이 남았던 영화가 생각났다. 그레고리 펙이 등장한 서부영화 ‘막켄나의 황금’이다. 황금 계곡을 찾아가는 여정 속에서 펼쳐지는 서부 풍경은 너무 강렬해서 황금이라는 미물을 가지고 싸우는 인간의 추잡한 욕망을 부질없게 만들었다. 언제 한번 꼭 가봤으면 하는 생각을 들게 하는,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추운 겨울바람이 부는 가운데 저녁노을이 점차 드리워진 황매산 풍경은 영락없이 그 영화의 풍경 그 자체로 나에게 다가왔다. 신비로운 기운에 감싸인 채 병풍 같은 화강암으로 덮인 산봉우리를 보며 이것이 황금의 엘도라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도연명의 ‘도화원기’에서 착안해 나온 조선 화가 안견의 ‘몽유도원도’의 화중 인물이라도 되는 듯한 착각에도 빠졌다. 정기가 강하고 억센 기운을 가지고 있다고 소문 난 황매산의 기암괴석 곳곳에 숨겨놓은 보물들이 있을 것 같았다.

영험한 모산재 아래에 터 잡은 영암사지는 주춧돌과 몇 개 유물들이 남아있어 역사의 흔적을 보여주는데 그 스산한 풍경과 강렬한 산봉우리들이 어우러지며 묘한 산수 풍경이 펼쳐졌다.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 이름 없는 절터라는 별명을 가진 이 폐사지는 시간의 영겁 앞에서 속세의 욕망은 허망하다는 진리를 일깨우는 듯하다. 그것은 마치 황금의 계곡이 무너지는 영화 마지막 장면과 오버랩됐다.

특히 영암사지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쌍사자석등은 황매산의 아름다움에 화룡점정을 찍은 듯 절묘하게 배치돼 시각적 효과를 준다. 석등의 불빛은 마치 인간의 어리석음은 무엇인가 하는 각성의 화두를 던져주는 듯했다.

요즘은 길이 뚫리고 교통이 편리해져 황매산에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모양이다. 게다가 매년 5월 철쭉제가 열려 갈수록 인간의 때가 묻은 것 같아 더욱 아쉽다. 도로의 확장과 교통의 발달은 인간에게 편리를 가져다주는 반면 세상에 노출되지 않았던 비경을 점점 사라지게 하는 아이러니가 있다.

마음속 황매산에 대한 첫인상의 숭고한 추억을 깨고 싶지 않아 번잡해진 그 곳에 다시 가고 싶지 않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름다운 바위덩어리를 바라볼 수 있는 곳에 터를 잡아 작업실을 짓고 거기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 허진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 및 동대학원 졸업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광주시 문화예술상 허백련미술상 본상, 제21회 용봉학술상, 제37회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심사위원 선정 특별예술가상 등 수상

-전남대 예술대학 교수

-개인전 29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