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사실상 첫눈이 내리면서 늦가을은 소리 소문 없이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 같다. 가로수 은행나무 잎들이 아직 매달려 있고, 아파트 입구 1톤 트럭행상에 가득 쌓인 사과더미를 보며 변변히 누리지 못했던 늦가을의 끝자락을 혼자서 붙들고 있었는데 말이다. 과일 중에서 유독 사과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사과는 행상 리어카에서든 세잔느의 그림에서든 언제 어디서 만나도 반갑다.

서양화가 윤병락(1968∼ )의 작품 ‘가을 향기’(2012년 작)는 나무 상자에 넘치도록 담긴 사과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풍성함을 과시한다. 사진을 토대로 한 극사실적인 그림이어서 이 작품을 처음 만나는 이들은 삼합지 이상의 두꺼운 한지 위에 극세필로 오랜 시간 공력을 기울인 작업의 완성도에 먼저 감탄한다. 이 같은 정밀한 작업 과정은 바늘로 가슴을 찌르는 듯 엄청난 자기 수양, 자신과의 집요한 싸움이 수반되었을 것이다.

경북 영천 출신으로 대구에서 미술대학을 나온 화가는 “영천에 과수원이 많았고 어머니가 어린 시절 과일행상을 하셔서 사과에 대한 기억이 남달랐다”고 한다. 화가는 사과가 작업의 대상이되 배경 없이 그림 자체가 오브제가 되는 작업을 위해 캔버스를 자신의 그림 형태대로 직접 제작해 사용하는 ‘변형 캔버스’ 방식으로 완성해 나갔다고 한다. 그 결과 화가의 작품은 마치 3차원의 공간에서 존재하는 듯 사과가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실재감을 주고 동시에 그 사과를 금방이라도 손을 뻗어 잡을 수 있겠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미술사에서는 카메라가 발명되면서 가장 타격을 받았던 이들로 화가들을 꼽는다. 눈에 보이는 대상을 모방하고 재현하는 그림의 역할을 사진이 대신하자 화가들이 그 전과 다르게 그림을 그려야했다는 것이다. 화가의 작품 역시 사과를 극사실적으로 재현한 그림이지만 사진이 제공할 수 없는 유년의 기억과 시각을 감각적으로 연결하고 있어 보는 이들에게 더 큰 감동을 주는 것 같다.

〈광주비엔날레광주폴리부장·미술사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