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동명동 작업실에서 이곳 수만리로 옮긴 지가 2개월이 넘어갑니다. 거리상으로는 광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데도 항상 저만치 따로 있던 곳이었습니다.

30년 가까이 마음에만 두고 있던 그곳. 수만리 화순 읍내에서 무등산 쪽을 바라보면 만연산이 떠억 서 있습니다. 만연산 우측 자락을 힘들게(요즘은 차가 시원하게 올려다 줍니다) 오르면 큰 재가 나옵니다.

이곳에 서면 무언가 다른 느낌이 예상되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가라앉고 차분해지면서 커다란 공간감이 다가섭니다. 큰 산과 함께 쭈욱 빨려들어가는 계곡 따라 수목의 함성들이 들리는 듯한 길을 따라가다 보면 수만리가 보입니다. 구불구불 시골길이 정겹습니다.

무등산이 국립공원이 되면서 안양산 방향길도 좋아졌습니다. 편백 휴양림이 있는 곳입니다. 양떼 목장에 즐비한 행락객들의 차량을 보니 이제 이곳도 많이 알려졌구나 싶습니다.

아침 공기가 어제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이 정도 기온이라면 겨울 맞습니다. 낮은 구름이 구렁구렁 만연산 뒷기슭을 오르고 있습니다. 이 아침 저 운무는 여기 수만리 풍경의 백미입니다. 햇살이 들어서면서 희미함은 걷히고 슬며시 드러나는 앞산의 단풍 함성은 그야말로 뭉클해집니다.

이때 드는 생각이 이렇습니다. ‘참, 그림 그린다는 일 허망하고나.’ 자연의 색감을 어찌 표현해야 한답니까. 부질없는 일 아닌가도 싶습니다. 풍경은 들일 데가 없으니 내어 두고 본다더니….

숲이 있는 곳에 사람 들어서는 거 좋은 일인듯합니다. 힐링해야죠.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도 항상 깨끗해져 있는 것을 보면 정말 좋습니다.

휴양림 쪽 재를 넘기 전 10년 가까이 숲을 산책로로 만드시는 분이 있는 뾰쪽 건물이 나옵니다. 수평류 안국현씨의 사무실(?)입니다. 30년전 수만리에 들어와 이제껏 수만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분입니다. 저는 이 양반을 그냥 ‘대장’이라고 부릅니다.

산일 하는 데 편안 옷이 군대 옷인 지 늘상 밀리터리룩 차림이라 그리 호칭합니다. 대장 만나 초면 인사하고 일주일 만에 작업실 공간 내 주셨으니, 뭐 통할 수 있는 무언가는 있겠다 싶습니다. 딱 1년 같이 살기로 하고 대장이 한마디 합니다.

“본인이 가진 능력의 120% 이상을 사용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산 중에서 버티기 힘듭니다.”

이 가을. 아니 이 겨울 또 한번 그림 그린다는 것에 주저주저합니다. 열심히 그림 그려야죠. 바람 잠잠해지면 하늘 한번 쳐다보고, 구름 구름 보면서 뭉클뭉클 해보고, 있는 그대로의 잔잔한 평화를,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숲을 만들어가는 안국현 대장의 수평류를 배워가면서…. 그러다보면 저절로 오는 게 봄 아닙니까.



※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