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시험을 앞둔 날 밤, 천재지변이 일어나 시험이 연기되기를 바라는 헛된 꿈을 가져보지 않은 이는 아마 드물 것이다. 지난 주 수학능력시험 하루 전 날 밤, 포항에서 규모 5.4의 지진 발생으로 인한 수능 연기 소식을 실화로 접하면서 지진이 이제 남의 나라 일만은 아니라는 공포가 무섭게 밀려들었다. 전대미문의 자연재해로 학교 교실 벽에 금이 가고, 아파트가 기울고, 건물 유리창이 떨어져 나가면서 동시에 크고 작은 우리들의 일상도 깨지고 금이 가고 흔들리는 걸 느낀다.

벨기에의 초현주의화가 르네 마그리트(1898∼1967)의 ‘정원의 열쇠’(1933년 작)는 평온한 일상이 깨진 유리창 되어 와르르 부서져 내린 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흡사 이번에 일어난 지진으로 건물이 덜컹거리면서 충격을 받은 유리창이 깨져 파편으로 흩어진 현장을 연상케 한다.

작가는 어느 한 방의 창가에 서서 커튼을 열고 창밖의 하늘과 언덕 위의 나무가 보이는 풍경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때 무엇인가의 충격으로 갑자기 유리창이 깨지면서 바닥에 떨어지는데 그 파편들은 투명한 유리가 아니라 우리가 바라보고 있던 외부의 풍경이 그대로 그려진 이미지이다. 과연 우리가 보았던 것은 유리창을 통해 바라본 창밖의 풍경인가, 유리창에 그려진 풍경인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졌던 상식적인 사실이 역전되고, 우리가 믿고 있던 인식 체계가 배반되는 당혹한 순간이다.

많은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무의식의 창조적 힘을 예술로 표현하기 위해 꿈의 영역을 사용했다면 마그리트는 오히려 재현의 세계를 통해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제시했던 작가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풍경과 대상을 재현하되 회화의 전통적인 경계를 넘어 이미지를 배반함으로써 환영의 세계를 보여주려 했던 것 같다. 그 때문에 작가는 자신에게 있어 회화의 진수란 “눈을 뜨고 있든 감고 있든 회화적 기법을 통해 예견되지 않은 이미지를 표현하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광주비엔날레광주폴리부장·미술사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