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2년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을 데리고 일산 도서관을 찾았던 백창화(53)씨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서가에는 70∼80년대 낡은 전집류의 책들만 꽂혀있을 뿐 신간도서는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도서관 사서는 아이들이 조금만 웅성거려도 “조용히 하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도서관이 아니라 열람실이나 다름없었다.

출판사에서 일했던 그녀는 아들이 책을 읽는 환경에서 자랄 수 있도록 어린이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책이 넘쳐나게 되자 이웃에 거주하는 아이들도 이용할 수 있게 집안에 사립 작은 도서관을 만들었다. 10년간 작은 도서관을 운영한 백씨는 아들이 대학교에 들어가자 오랫동안 꿈꿨던 귀촌을 결심했다.

전원생활은 당시 회사원인 남편의 버킷리스트이기도 했다. 풍광이 좋은 자연 속에서 책을 읽으며 시골주민들과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어서다.

때마침 지인으로부터 충북 괴산군이 전원주택단지 인근에 미루마을 교육회관을 건립중이라는 얘기를 듣고 지난 2011년 이삿짐을 쌌다. 교육회관 내에 도서관을 운영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전원주택 분양사의 자금난으로 마을회관 건립이 물거품 되면서 부부의 꿈은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그들이 아니었다. 당초 계획을 수정해 자신들이 거주할 시골집을 도서관으로 만들기로 했다. 3년간의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지난 2014년 4월, 국내 최초의 가정식 책방을 오픈했다.

지난주 취재차 방문한 ‘숲속작은책방’은 마치 동화에 나오는 요정이 살고 있는 집 같았다. 피노키오의 얼굴이 새겨진 책방 간판 밑에는 “책을 좋아하는 분들의 방문을 환영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들어 오시면 꼭 책 한 권은 구입하셔야 해요”라는 안내문이 내걸려 있었다.

마당 안으로 들어서자 원두막을 책방으로 꾸민 공간과 해먹이 설치된 야외책방이 방문객을 맞았다. 시골 외가나 지인의 별장에 놀러 온 기분이 들었다. 마당은 예쁘게 단장된 꽃과 나무, 아기자기한 인형과 소품들로 가득했다. 말 그대로 숲속책방이었다.

녹색의 철제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서자 1층 천장까지 빼곡히 들어찬 서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 보니 전원 주택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가죽 소파나 값비싼 가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신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에서부터 인문서, 여행서적, 소설, 에세이, 철학 책 등 모든 분야의 서적 2000여 권이 비치돼 있었다. 특히 한쪽 벽면에는 환경보호와 자연생태의 중요성을 일깨운 책들이 가득했다. 찬찬히 서가를 들여다 보니 외국 동화책들도 상당했다.

수많은 책을 품고 있는 목재서가도 인상적이었다. 부인과 함께 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김병록(55)씨가 직접 못과 망치로 만든 핸드메이드 작품이다.

“이곳에 책방을 열기 전 아내와 함께 35일 동안 유럽의 도서관과 책 마을을 둘러 볼 기회를 가졌어요. 2010년 이탈리아 볼로냐 아동도서전 일정에 맞춰 떠났는데 산골 동네에도 성업중인 작은 책방들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인터넷 서점과 대형서점에 밀려 동네서점들이 사라져가고 있었거든요. 문득, 도서관도 좋지만 부담없이 책을 읽고 즐길 수 있는 책방이 더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다고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다. 동청주 세무서에서 사업증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던 부부는 ‘시골 산속의 책방을 찾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라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지난 2014년 12월 30일 저녁, 아내와 함께 7개월간의 매출액을 결산해보니 759만 3천 원이더군요. 하지만 입소문이 난 지 불과 2∼3개월 만에 올린 실적이어서 희망을 가졌어요. 숲속책방은 홍보나 마케팅 없이 순전히 지인들의 SNS로 유명해졌거든요. 시골책방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잘 살리면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생겼어요.”

그가 내세운 숲속작은책방의 첫 번째 특징은 가정식 책방이었다. 영국의 헤이 온 와이 등 유럽의 책 마을을 둘러 볼 당시 책방 2층에 운영중인 숙소에서 관광객들이 장시간 체류하는 걸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 따스한 거실 분위기가 감도는 책방은 여느 책방에선 느낄 수 없는 정서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월 임대료나 인건비가 따로 소요되지 않아 안정적으로 오랫동안 운영될 수 있다는 점도 숲속작은책방만의 매력이다. 이곳을 찾는 방문객은 지난해에만 5700여 명(한 달 평균 500∼600명)이 다녀갔다.

이곳의 또 다른 특징은 시골집에서 하룻밤을 머물며 책을 읽는 북스테이(book stay)를 운영한다는 점이다. 2층 다락방을 개조한 객실에는 침대와 거실, 책들로 가득 찬 서가가 어우러져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살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루 1팀(6명 이내)만 이용할 수 있으며 인원 수에 따라 6만, 8만, 9만, 10만 원의 가격이 책정돼 있다. 지난해 이곳을 거쳐간 민박객도 400여 명에 달한다.

뭐니뭐니해도 숲속작은책방의 특징은 방문객들은 무조건 1권의 책을 구입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김씨는 ‘행복한 소비의무’라는 용어를 썼다. “서점이란, 그곳에 들어가면 반드시 책을 한 권이라도 사들고 나와야 하는 곳. 그곳에서 내게 필요한 정보를 얻었거나 친구와 만남의 장소로 이용했다면 더더욱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책 구매로 치러야 한다고 생각해요.” 동네 책방들이 우리 곁에 오래 머물도록 하려면 고객들의 구매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물론 모든 방문객이 책을 구입하는 건 아니지만 점차 자신들의 운영원칙을 이해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고 귀띔한다. 또한 김씨 부부가 책을 읽고 느낀 점을 적어 겉표지에 씌운 띠지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북 클럽, 목공 체험활동 ‘내 인생의 책꽂이’, 북 콘서트, 작가와의 대화 등 문화행사도 풍성하다.

“동네서점엔 요즘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요. 도서정가제 개정(모든 도서에 정가 대비 10% 이상 할인하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제도)으로 전국에서 동네서점이 생겨나고 있지만 과연 5년 후에도 살아남는 곳이 몇 군데나 될까요. 책방 지기들의 개인적인 노력도 필요하지만 동네책방의 문화프로그램을 지원하거나 독서동아리를 활성화시키는 공적 영역의 지원이 뒷받침돼야 합니다.”

/충북 괴산=박진현 문화선임기자jhpark@kwangju.co.kr



※ 이 시리즈는 삼성언론재단의 기획취재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