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대륙에는 아름다운 도시가 많이 있지만 가장 매료되었던 곳은 프라하다. 짧은 체류기간에도 강렬한 추억을 남겨준 이 고풍스러운 도시는 떠올릴 때마다 움츠려져 있던 나의 예술적 열정을 움직이는 신비하고 묘한 마력이 있는 듯하다.

40일간 이어진 배낭여행의 막바지였던 20여 년 전 8월, 프라하 역에 도착한 순간 느낀 첫인상은 뭔가 어둡고 음울한 것이었고 풍요롭고 세련된 서유럽과는 다른 유행에 뒤쳐져있는 곳 같았다. 힘들게 도착한 호텔의 분위기도 실망스러웠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영화 ‘카프카’가 생각났다. 감독이 보여주는 프라하는 기괴(奇怪)와 신비(神秘)를 간직한 흑백도시이면서 과거·현재·미래를 넘나드는 듯 한 묘한 도시였다. 영화가 매우 마음에 들어 주인공 제레미 아이언스가 회색 건물 벽면을 배경으로 뭔가에 쫒기는 듯 한 실루엣을 따라 급하게 달려가는 모습의 흑백포스터를 구입해 거실 한편에 두었던 기억이 있다.

작은 호텔에서의 첫날, 제레미 아이언처럼 흑백의 가상 현실과 같은 악몽에서 헤매다가 해가 높이 뜬 다음에야 눈이 떠졌다. 꿈은 너무 혼란스러웠고 동양미술을 공부한 나는 카프카 소설 ‘변신’의 주인공이 곤충으로 변하는 것에서 자연스레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을 떠올렸다. 중세 유럽의 이미지를 간직한 동유럽의 도시이지만 지리적으로 동양과도 가까운 때문일까. ‘노장사상(老莊思想)’과도 맥이 닿아있는 듯 느껴진 것은 당시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그러나 호텔에서 나와 바츨라프 광장, 천문시계탑, 화약탑, 카를다리의 탑과 동상들, 프라하성, 성 비투스성당, 황금소로 등을 돌아보며 영화와 꿈에 사로잡힌 흑백의 잔상에서 벗어나 색채가 화려한 도시의 매력에 사로잡히게 됐다. 천년의 역사를 아우르는 프라하 구도심은 그 자체로 건축박물관이라 칭송받을 만큼 서양 건축사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오랜 시간에도 중세의 아름다움은 변치 않았으며 곳곳에 이야기의 내력과 역사의 흔적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가장 인상에 남은 곳은 황금소로였다. 프라하의 랜드마크라는 프라하성 동문 쪽에 위치한 이 골목길에는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소인종족 호빗들이 모여 사는 듯 한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연금술사 및 금은 세공사들의 천국이라는 그곳을 배회하다 보면 카프카의 집필 흔적이 남아있는 22번지를 만날 수 있다. 그 작업실은 여동생이 구해준 곳으로 프라하성에서 모티프를 얻어 쓴 작품 ‘성’이 탄생한 곳이다.

한때는 중세유럽의 심장이었던 천년고도 프라하는 인간의 운명을 부조리로 느끼고 현 존재의 실존 문제에 주력했던 카프카라는 작가의 명성 덕분에 수많은 예술가의 귀의처이자, 예술적 영감의 원천으로 세계에 다시 알려지게 된다.

팍팍한 현실에 내 안의 열정과 기쁨이 다 소진되어 텅 비어버린 것처럼 느껴질 때, 과거인 듯 현재인 듯 정확한 시간을 알수 없는 공간같은 그곳에서 나를 다시 채우고 싶다.

카프카 없는 프라하는 상상하기 힘들다. 이 먼 도시로 여행 오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왠지 모르게 음울하지만 기품 있고 아름다운 꿈속에 있는 듯 한 도시의 풍경과 함께 우울하고 고독했던 한 작가의 흔적이 남는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허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동양화전공) 및 동 대학원 졸업

-23회의 개인전 440여개의 그룹, 기획, 초대전

-제8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 제1회 한국일보 청년작가 초대전 우수상, 2001오늘의 젊은 예술가상(문화관광부) 수상

-전남대 예술대학 미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