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슬프고, 무겁게만 느껴졌던 ‘임을 위한 행진곡’이 ‘오르골’(orgel) 특유의 매력적인 소리로 흘러나왔다. 광주에서 문화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는 박은현(여·27)씨가 최근 기획하고 제작한 ‘오월의 오르골’이다.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을 대표하는 민중가요인 ‘임을 위한 행진곡’을 오르골로 직접 들어보니 어떠세요? 색다르지 않나요?”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짓는 그다.

박씨는 지난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뒤 ‘새로운 세상을 보자’며 무작정 프랑스로 여행을 떠났다. 낭만의 도시 프랑스는 그녀의 감성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세월의 흔적이 물씬 풍기는 건물과 풍경에 매료됐다.

예술가들이 모여있는 몽마르트 언덕을 오르던 중 기념품 판매점에서 오르골을 보게 됐다. 지인들에게 의미 있는 선물을 고르던 차였다. 그때 문득 ‘광주 버전 오르골’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오르골 소리가 참 좋잖아요. 아날로그적이면서 신비한 소리가 매력적이고요. 이런 소리를 다른 나라 음악이 아닌 우리 음악으로 들으면 어떨까? 더더욱 지역의 가치 있는 음악을 오르골에 담는다면 어떨까? 이런 생각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지인들의 의견을 모아 아이디어를 발전시켜나갔다. 광주의 가치와 의미를 잘 담고 있는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을 오르골에 담기로 했다. 하지만, 평소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면 무겁고 슬픈 느낌이 강했다. 5·18 관련 콘텐츠를 피해가는 주변 기획자나 친구들의 모습도 많이 봐왔다. 이런 분위기를 깨고 극복해나가기 위해서라도 오르골을 만들어내는 게 중요했다.

그렇게 아이디어 기획을 끝냈다. 평소에 “생각만 하지 말고 실천하자”는 신념대로 실제 제작하는 단계에 돌입했다. 수중에 가진 돈이 없었기에 공모전을 활용했다. 아이디어 공모전에 응시해 2등을 수상하면서 상금과 자신감 둘 다 얻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아이디어를 초기 모델로 구현할 수 있는 시제품 지원사업도 신청해 선정됐다. ‘탄탄대로’를 걷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고생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제품을 만든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심지어 오르골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인 ‘무브먼트’(태엽으로 소리를 만들어내는 수동식 동력장치)는 한국에서는 만들 수 있는 업체가 없었습니다. 인터넷과 제가 가진 모든 인맥을 다 뒤졌죠.”

결국, 일본협력사를 만날 수 있게 됐으나, 협력사를 찾은 것만으로 무브먼트를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사용하기에 앞서 작곡가인 김종률 현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의 승낙을 받아야했다. 연락을 취해 자신의 프로젝트를 설명하고 ‘사용해도 좋다’는 승낙을 받아냈다.

1980년 5월을 경험한 세대든, 경험하지 않은 세대든, 모두에게 부담스럽지 않게 다가갈 수 있는 소리를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1차로 나온 멜로디 샘플링을 다양한 연령대에 들려주고, 의견을 수렴해 지금의 소리가 됐다.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무브먼트가 들어가는 케이스를 만드는 것이었다. 소량생산은 어렵고 최소 1000개 이상을 제작해야했다. 시제품을 만들자고 1000개 이상의 케이스를 주문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과감하게 제작방향을 바꿨다. 기성품 케이스를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대신, 처음의 아이디어의 방향을 잃지 않으려고 일러스트를 잘 다루는 친구와 함께 5·18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자료를 찾고, 실제 현장을 돌아다니는 등 가장 적합한 도안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녔다.

“올해 37주년을 맞은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시민들과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습니다. 그간 세상에 의해 숨겨졌던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정권의 변화와 함께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죠. 이 시기에 맞춰 오르골이 완성돼 더 많은 분들의 관심을 받게 된 것 같습니다.”

그녀는 최근 과분한 관심을 받고 있다며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뜻깊고 의미 있는 제품을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칭찬 때문이다.

오르골에서 흘러나오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색다름 때문에 젊은층도 보다 쉽게 5·18민주화운동에 다가갈 수 있겠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4∼5살 아이들이 오르골을 갖겠다며 다툴 정도로 매력이 있다거나 광주에 온 외국인 친구들에게 선물하니 너무 좋아했다는 말을 전해들으면 그렇게 뿌듯할 수 없다는 게 그녀의 설명이다.

‘오월의 오르골’을 만들어낸 그의 삶은 이제 시작이다. 그의 미래는 아직 구체적이지 않다. 미래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지 아직도 모르겠다. 하고 싶은 것도, 관심 있는 일도 더 많기에….

그녀는 “‘오월의 오르골’을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갈 계획이지만 일상 속에서 오월에 대한 세대간 격차를 줄이고, 광주의 오월을 더 부드럽게 생각할 수 있는 프로젝트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불확실한 표현이지만 저는 앞으로도 관심은 예술을 통해 삶과 사회를 연결하는 그 어디쯤 있을 것 같아요. 기회가 된다면 다른 지역의 가치있는 음악들도 오르골에 담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