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부터 내리던 비가 그치자 마을은 다시 고요한 침묵 속에서 살금 거린다. 젖은 잎새 위로 촉촉한 새벽 안개가 몸을 부비는 아침, 우리 일행은 안내자의 차에 몸을 싣고 바이칼 호수로 향한다.

하늘이 맞닿아 끝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곧고 길게 뻗은 길가로 비에 흠뻑 젖어 싱싱한 자작나무 숲이 모락모락 안개를 토해내고 있다. 군데군데 러시아인들이 별장으로 이용했다는 ‘다차’라는 목조 가옥들이 빈 채로 서있고, 앙가라 강으로 흘러드는 작은 개울들이 엮어내는 풍광이 상쾌하다.

바이칼 호수를 향해 30여분 차를 달리다 보면 러시아의 옛사람들이 살았던 전통가옥을 그대로 옮겨 놓은 목조 박물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댐을 만들기 위해 수몰되는 마을을 옮겨 놓은 것이라 한다. 오랜 역사의 흘러간 시간을 그대로 간직 한 듯 낡은 통나무들로 엮인 가옥들은 순전히 도끼만을 이용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어떻게 원시적인 목공 도구, 도끼 하나만을 이용해서 저렇듯 아름다운 집을 만들었을까 놀랍기만 하다.

한국 옛 시골집을 연상케 하는 내부는 나무그릇이며 나무 숟가락 그리고 물레 같아 보이는 것과 옷감을 짜기 위해 사용된 틀이 우리의 것들과 너무도 유사하다. 바이칼호가 우리 민족의 근원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곳에 와보니 그 말이 새삼 실감난다.

바이칼호는 시베리아의 진주라 불리며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호수(최대 수심 1742m)이다.

‘풍요로운 호수’라는 뜻의 바이칼호는 336개의 하천이 흘러들지만, 단 한 군데 앙가라 강으로만 흘러 나간다. 이르크츠크에서 50분 정도 차를 달려 바이칼과 앙가라 강이 만나는 지점에 ‘리스트비앙카’라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속에 작은 마을이 있다.

바람으로 안개가 걷히면 드러나는 아름다운 섬과 풀을 뜯는 몇 마리의 소들이 더없이 한가로운 넓은 초지의 마을. 그리고 홀로 외로이 배 위에서 낚시를 드리운 어부들. 아득한 수평선과 지평선이 닿아있는 절묘한 혼재의 장소. 호수라지만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바이칼 호수는 바다와 다름없다.

선창가 배표와 음식을 파는 가게에 들어서니 낮술에 취해 시끄러운 마을의 총각과 처녀들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이국의 사내들을 맞는다. 술 한 잔을 가득 잔에 부어 내미는 그들 사이에 끼어 앉아 보드카 한 잔을 얻어 마시고 미소를 위주로 보디랭귀지. 한참 동안 우리 한국을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하다가 ‘88서울올림픽’을 말하자 이내 “오! 태권도”를 연발하며 주먹을 들이민다.

보드카 한 잔에 화답하여 청년의 애인으로 보이는 아가씨를 스케치해주니 정표로 건네주는 선물이 혹 우리가 모르는 문화적 배경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별 쓸데없는 소나무 가지다. 참으로 순박하기 그지없는 시골 인심과 다름없다.

아름다운 강변 마을과 선착장, 요트 위에서 물을 퍼 올리는 건장한 청년과 안개 사이로 반짝이는 파란 하늘빛을 흠뻑 안은 언덕의 그림 같은 집들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내 주위로 몰려들어 깔깔거리며 무슨 뜻인지도 모를 말을 지껄이는 햇살 같은 아이들을 스케치 한다.

여행길에는 언제나 낯선 풍광과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엮어지는 삶들은 결국 우리의 살아온 삶과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여행의 소중함은 한 걸음 한 걸음 놓는 발길 뒤에 드리워진 삶의 잔잔한 그림자를 확인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눈 감으면 아련한 안개에 젖은 바이칼호의 찰랑거리는 물결이 가슴 가득 차오르고, 이국 아이들이 쏟아내던 ’때 묻지 않은 웃음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오래 맴돈다.

삶의 그림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현대인에게 이정표를 밝혀줄 것이다. 그림자를 따라 걷다보면 결국은 그 그림자가 내 모습임을 발견하게 된다. 남이었던 그들이 바로 우리가 되는 신비로움을….

* 김해성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및 동대학원 졸업

-개인전 20회

-쾰른아트페어, All About Ko rea(White Box, Munich, Germany)등 단체전 500여회

-조선대 평생교육원 전담교수, 한국미술협회 이사, 선과 색 회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