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 살아 실제 섬기기 다하여라 /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이하리 / 평생에 고쳐 못할 일 이뿐인가 하노라’

북한이탈주민 송정실(여·38)씨가 인민(초등)학교 다닐 적 아버지에게서 배운 시다. 북한에는 당과 수령에게 충성을 묘사한 시들만 있는 지 알았는데, 아니었다. 선조들의 옛시도 배운단다. 이 조그마한 일에서 탈북민도 우리 동포요, 한민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시는 송강 정철의 훈민가(訓民歌) 일부다. 정철이 강원도관찰사로 재직할 때 백성을 교화ㆍ교유ㆍ계몽하고자 지은 시조다. 부모에 대한 효를 강조하며, 효도하고자 할 때에 이미 부모를 여의고 효행을 다하지 못하는 자식의 슬픔을 이르는 말인 ‘풍수지탄(風樹之嘆)’을 표현했다.

◇시를 좋아한 문학소녀

정실씨는 두만강 연안에서 태어났다. 시를 좋아하신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문학소녀의 꿈을 키웠다.

인민학교에서 고등중학교까지 그는 반에서 1, 2등을 놓치지 않았단다.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내세울 건 공부밖에 없었다고 한다. 3남매 중 둘째딸인 탓에 할머니는 언니만 예뻐했다. 남동생은 아들이라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학교에서는 노동당원이 아닌 집안이다보니 따돌림 당하기 일쑤였다. 오기가 발동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공부만큼은 뒤지지 않겠다는 오기. 그래서 악착같이 공부했다. 표창장도 많이 받았다.

고등중학교 시절 그는 문학소녀가 꿈이었다. 선생님은 그에게 교사가 되라고 했다. 문학교사가 돼 아이들을 가르치며 시를 쓰면 되겠다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꿈을 허용하지 않았다. 교원대에 가지 못한 것이다. 전문학교 입학통지서를 받았지만 대학 진학은 할 수 없었다. 온 나라가 식량난에 허덕이던 ‘고난의 행군’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대학을 포기했다. 어느날 누군가가 나를 찾아와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중국에서 한 달만 돈을 벌면 북한에서 1년 먹을 쌀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동안은 다른 곳에 행방(보따리장사)을 떠난 것으로 만들어 놓겠다고 했다. 솔깃했다.

그렇게 19살 철 없는 소녀는 두만강을 건넜다. 고향과의 작별이었고, 부모와의 이별이었다.

◇탈북과 함께 찾아온 인신매매

두만강은 차디찼다. “돈을 벌리라” 마음먹고 차디찬 두만강을 건넜지만 중국에서의 생활은 북한에서보다 더욱 참혹했다. 인신매매였다. 사람이 아닌 물건이 돼 중국 시골로 팔려간 것이다. 사방이 산으로 뒤덮인 연변의 한 시골이었다. 앞이 캄캄했다. 남편은 소아마비 후유증을 앓는 장애인이자, 알코올 중독자였다. 술만 마시면 폭력을 휘둘렀다. 집은 오지게 가난했다. 전기세를 내지 못해 전기가 끊길 정도였다. 밤낮으로 논밭에서 일해야 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무서운 건 북송의 두려움이었다. 중국 공안의 눈을 피해 살아야 했다. 비닐하우스·옥수수창고에서 잠들기 일쑤였다. 그렇게 11년을 살았다.

몸은 가난과 질병으로 망신창이가 됐다. 마음은 주정뱅이 남편 때문에 둥둥 떠다녔다. 북한을 떠날때 58㎏이었던 몸무게는 38㎏로 줄어들었다. 지칠대로 지친 그는 지옥같은 그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2009년 10월 어느날, 그는 옷을 주섬주섬 입고 나섰다. 한국을 향해서. 한국행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성공하면 다행이지만, 실패하면 죽음이다. 3개국을 넘고 5개 감옥을 거쳐 2009년 12월 한국에 도착했다.

◇차별·냉대 딛고 기자가 되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똑같은 언어이지만, 섞어 쓰는 외래어 탓에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생활환경도 북한·중국과 너무 달라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외로웠다. 우울했다.

하나원을 나오면서 받은 정착금은 고스란히 브로커에게 넘겼다. 그의 손에는 달랑 20만원이 남았다. 당장 먹고 사는 게 문제였다. 광주에 온지 사흘만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삼겹살이 주메뉴인 식당이었다. 알바 첫날 정실씨를 본 주인은 “너는 이 나라 국민이 아니다. 이 나라 세금으로 들어온 거지다”라고 냉대했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대구도 못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거지’였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5년 후 당당하게 이 식당에 다시 오겠다며. 그리고 5년이 지난, 2015년 6월 남편과 두 아이를 데리고 이 식당을 찾았다.

정실씨는 제대로 정착하려면 배워야 했다.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낮에는 컴퓨터학원에서 전산회계와 컴퓨터 활용을 익혔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니 알게 모르게 차별·냉대를 받았다. 말투 때문에 ‘어디서 왔냐’고 질문을 많이 받았다. 북한에서 왔다고 하면 두번 세번 위 아래로 훑어보는 것이다. 아마도 뿔이 어디에 있나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북한 사람은 뿔이 있다고 배웠다니 말이다.

그러다가 같은 처지의 북한 남자를 만났다. 결혼했고 임신했다. 임신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중국에서 낳은 아들 생각 때문이었다.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남편이 아들을 데려오자고 했다. 그리고 3년 만에 아들을 데려왔다.

정실씨는 한국에서 많은 것을 해냈다. 문턱에도 못가본 대학공부를 시작했다. 서영대를 거쳐 광주여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했고, 지금은 광주여대 사회개발원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있다.

문학소녀가 되고 싶었던 꿈은 지금 이뤄가고 있다. 남북하나재단에서 발간하는 ‘동포사랑’과 ‘착한공감’의 취재기자다. 탈북민들의 드라마틱한 삶을 글로 쓴다. 그는 새로운 꿈을 꾼다. 전국을 발로 뛰며 취재했던 탈북민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는 것이다.

정실씨는 후배 탈북민들에게 “기회가 된다면 공부를 하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공부를 하면서 이곳 사람들과 잘 어울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정욱기자 jw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