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팍한 형편과 취업난에 시달려 스스로 ‘나홀로족’을 자처하는 청년들이 늘고 있다. 혼밥(혼자 밥 먹기), 혼술(혼자 술 먹기)은 우리 사회에서 어색하지 않은 단어가 됐다. 어려움이 생겨도 가족·친구에게 고민을 말하는 걸 사치로 여기는 씁쓸한 세태다. 취업 포털 사람인이 지난해 20∼30대 1593명을 설문한 결과, 52.5%가 자신이 ‘나홀로족에 해당한다’고 응답했다. 전체 응답자의 44.1%는 ‘개인주의 가치관이 팽배하기 때문에’ 나홀로 문화가 확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기 불황(19.8%) ▲비혼자 증가(12.1%) ▲청년실업 증가(8.9%) ▲가족의 의미 변화(5.3%) 등도 원인으로 꼽았다.

상대방을 직접 만나는 것보다는 전화를 하거나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이마저도 기피하며 말문을 닫는 요즘 시대에 손편지를 쓰는 이들이 있다. 익명의 시민으로부터 고민을 듣고 답장을 써주는 ‘나미야 상담소’는 지난 2015년 9월부터 광주지역 사단법인 ‘청년문화허브’가 운영해오고 있다. 국내에서 50만 부 넘게 팔린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서 영감을 얻었다. 소설 속 낡은 나미야 잡화점의 주인 나미야 할아버지는 동네 꼬마들의 고민을 해결해준다. 꼬마들이 가게 앞 우편함에 편지를 넣어두면 할아버지는 답장을 써 우유 상자에 담아 놓는 식이다.



젊은이들만 나미야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는 건 아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여동생을 시샘하는 5살 아이부터 회사를 그만 둔 자식의 앞날을 걱정하는 중년 부부, 인생 2막을 앞둔 60대까지 다양하다. 나미야 상담소 활동가들은 각자 일주일에 7∼8통의 사연을 받고 답장을 쓴다.

이혜영(19)양은 소설 속 나미야 할아버지의 모습과 거리가 멀지만 나미야 상담소 ‘터줏대감’이다. 1기에 참여한 데 이어 2·3기에 걸쳐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올해는 청소년이 자주 찾는 광주청소년삶디자인센터와 전남공고점을 담당하게 됐다. 청소년의 입장에서 가질 수 있는 걱정이나 고민에 더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다. 이양은 친구와 지난해 1월 스마트폰 앱을 통해 나미야 잡화점을 알고 유·스퀘어 보관함에 쪽지를 넣었다. 나미야 할아버지는 이양 일행이 쪽지에 남겼던 이메일로 답장을 보냈다. 이양은 나미야 할아버지와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자연스럽게 나미야 상담소에 합류하게 됐다.

이양은 학교 밖 청소년이다. 대입 공부가 전부인 학교의 쳇바퀴 같은 나날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교 1학년 때 학교가 야간자율학습 학부모 동의서에 서명을 받아오라고 강요한 날 이양은 학교를 그만 두기로 결심했다. 다음달 고졸 검정고시를 앞둔 이양은 대학에서 극작가 공부를 하려는 목표를 세웠다.

이양은 “호기심으로 상담을 시작했는데 해가 바뀔수록 다른 사람의 얘기를 귀 기울여 듣게 된다”며 “고민을 나누면서 나 자신을 다잡고 용기를 키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심리학을 전공하고 싶었던 최은석(25·전남대 경영학과 4년)씨는 나미야 상담소에서 활동하며 못 다한 꿈을 이루고 있다. 그는 지난해 7월부터 나미야 할아버지를 맡으면서 자신의 꿈에 대한 의지가 더 굳어졌다고 말했다. “뭘 하고 싶은 지 모르겠다”며 취업전선에 내몰린 또래들의 사연을 받을 때 최씨는 먹먹해진다. 그 역시 졸업반이 되면서 취업에 대한 부담이 몰려들기 때문이다. 나미야 상담소에 오는 사연은 진로·취업 고민이 상당수다.

하고 싶은 일이 있지만 부모님 때문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야 한다는 한 취준생에게는 “일단 저지르라”로 말했다. 한 분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면 진심은 통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청년문화허브와 인연을 맺으며 레드페스타·세계청년축제 등에 참여한 최씨는 공연·행사 기획자로서 새로운 도전을 하려 한다.

최씨가 상담을 하면서 아쉬웠던 순간도 있다. 20대 초반에 결혼한 경기도 지역 여성이 “시어머니와 다툴 때마다 내 편을 들지 않는 남편이 야속하다”는 넋두리를 하거나, 여고생만의 감수성 짙은 고민이 들어올 때는 좋은 조언을 주기 힘들었다. 이럴 경우엔 동료 활동가에게 상담을 부탁하기도 한다. 나미야 할아버지 ‘중고참’이 된 최씨는 어떻게 하면 상담을 더 잘할 수 있을지 고민이다. 그는 “편지에 진심을 담기 위해 감성이 충만한 밤에 답장을 쓴다”고 귀띔했다.

매주 토요일 청소년 활동가들과 모여 답장을 쓰는 이양은 “악필이라 상대방이 편지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쑥스러워 했다.

사람 사는 세상에 정답이 있을까. 나미야 할아버지가 매번 훌륭한 해결책을 내놓을 수는 없다. 사연을 보낸 이들도 이를 알고 있다. 자신의 고민을 누군가가 들어주고 따뜻하게 보듬어 주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들에게 위안이 되고 있다.

/백희준기자 bhj@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