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에 사는 서은아씨는 북한이탈주민이다. 올해 서른다섯으로 젊다. 하지만 그녀는 인생 3막을 살고 있다. 그녀의 인생 1막은 ‘북한에서의 삶’이고, 2막은 친구의 배신으로 인신매매된 ‘중국에서의 삶’이다. 그리고 지금 막을 올린 인생 3막은 ‘대한민국에서의 나를 찾는 과정’이다.

◇12살에 배운 ‘미싱’으로 가족 부양

은아씨는 1982년 강원도에서 태어났다. 딸만 셋인 집의 맏이였다. ‘큰 물에서 크게 커라’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인민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직전에 이모가 사는 함경북도 청진시로 유학을 떠났다. ‘전교 1등’이었던 성적이 조기유학의 계기가 됐다. 여기에 ‘집안에 있는 천재보다는 나다니는 바보가 낫다’는 어머니의 철학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은아씨는 청진에서 공부를 이어가지 않았다. 12살에 처음 만진 ‘미싱’(재봉틀)에 재능을 보이면서 학교는 멀어졌다. 3년간 ‘시다’ 생활을 하며 재봉일을 배웠다. 학교보다는 공장으로 출근했다. 의무교육인 탓에 학교는 다녀야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상업전문학교에 진학해 ‘옷 설계사’, ‘옷 재단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런데 이 자격증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집에서 옷을 만들어 장사를 하는 거였다.

청진2사범대학교에 입학, 잠시나마 대학생활도 했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던 그때 대학 공부는 사치였다. 공부보다는 장사가 적성이 맞는 것도 같았다. 옷을 만들고 팔아서 얻어지는 수입으로 가족을 위해 식량을 구입하는 것이 가족을 위해 길이었다.

은아씨는 ‘패션 디자이너’로서 원단에 대한 욕심이 컸다. 그러던 2006년 어느날, 함께 일하던 친구가 꼬드겼다. 나진·선봉에 가면 좋은 천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만 믿고 친구와 함께 낯선 도시를 찾아 나섰고, 새벽에 강을 건넜다. 그리고 딴 세상을 봤다. 새벽인데도 간판의 불이 번쩍번쩍했다. 그런데 그 곳은 진짜 딴 세상이었다. 강은 두만강이었고, 땅은 중국이었다. 은아씨의 ‘인생 1막’ 마지막 장면이었다.

◇친구에 속아 인신매매 신세로

은아씨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인신매매에 걸려들었다. 친구가 브로커에게 돈을 받고 팔아넘긴 것이다. 그렇게 정처없는 중국 생활이 시작됐다.

그녀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할아버지이든, 알코올중독자이든, 장애인이든, 브로커는 돈만 받고 팔면 그만이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어차피 팔려갈 것이라면 겉보기라도 그럴싸한 집으로 들어가자고. 네다섯 곳을 거치는 동안 가장 크고 멋있는 집을 골랐다. 그리고 브로커에게 졸랐다. 이 집으로 보내달라고.

은아씨는 운이 좋았다. 넉넉한 집안이었다. 그 집엔 노인이 살고 있었다. 노인이 남편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노인 아들과의 혼사였다. 하지만 아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한 달가량 그 집에 머무르다가 도우미아주머니와 함께 시내로 거처를 옮겼다. 시내에 있는 집에서는 한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도우미아주머니는 감시자였다. 남편은 그곳에도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중국말을 못하니 답답했다. 중국어를 배우기로 마음 먹었다. 그 때부터 자는 시간 빼고 줄곧 TV만 봤다. 동작을 보고 말을 배웠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간단한 말은 할 수 있게 됐다. 도우미아주머니와 시댁 간의 전화통화도 알아듣게 됐다.

은아씨가 그 집으로 들어간 연유는 ‘대리모’였다. 은아씨와 결혼할 아들은 3대 독자였다. 부인이 있지만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래서 대리모를 구한 것이었고, 그게 은아씨였다. 하지만 아들은 대리모를 원하지 않았다. 그런 탓에 은아씨는 남편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채 혼자 살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중국 공안이 은아씨가 머물던 집을 급습했다. 시댁과 갈등을 빚던 도우미아주머니가 탈북민이 있다고 신고를 한 것이다. 북송되는 순간 죽은 목숨이 된다. 두려웠다.

그녀는 시댁에 매달렸다. 제발 꺼내만 달라고. 시댁에서는 3만 위안(600만원)을 주고 그녀를 꺼내줬다. 그러면서 한국으로 가서 살라고 권했다. 아들의 뜻이 너무 완곡해 더 이상 대리모는 필요없게 됐다면서. 인생 2막, 중국에서의 인신매매 삶이었다.

◇낯선 한국에서 인연을 만나

2009년 9월 태국을 거쳐 한국땅을 밟았다. 그리고 하나원 수료 후 2010년 2월 광주에 정착했다.

한국 생활은 낯설었다. 이야기마다 외래어가 섞인 탓에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처구니 없는 실수도 했다. “어느날 아파트 10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만원입니다’라는 소리가 나오더라구요. 엘리베이터를 타려면 1만원을 내야한다는 얘기구나 싶었죠. 그래서 얼른 내렸죠. 그 이후 한동안 계단을 이용했어요. 그러다가 급한 일 때문에 엘리베이터를 타게 됐네요. 그런데 ‘돈 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는 거예요. 1만원 굳었다며 엄청 좋아했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자랑했더니 그 친구가 하는 말이 ‘너 아직도 엘리베이터 안타니. 만원이 돈 달라는 게 아니라, 꽉 차면 만원이라고 한다’는 거예요. 어이가 없더라구요.” 그만큼 낯설었다는 것이다.

은아씨가 한국 생활에 적응한 데는 남편의 역할이 컸다. 광주에 온지 1년째 친구의 소개로 ‘좋은 남자’를 만났다. 그리고 결혼했다. 결혼과 동시에 아이를 임신했다. 잘하는 일을 찾아 취직하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우울증 때문에 힘들었다. 그때 남편이 공부를 권했다. 북한에서는 가족을 먹여살리느라 공부를 접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곳에서 다시 시작해보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다들 스펙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이력서의 최종 학력은 본다며.

남편의 그 한마디에 은아씨는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부랴부랴 2년제 전문대학에 등록을 했고, 2013년 3월 만학도가 됐다. 이어 광주대학교 사회복지학과 3학년에 편입했고, 올해 2월 졸업했다. 지금은 전남대 정책대학원 사회문화복지학과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그녀는 현대해상 하이플래너(보험설계사)다. 낯가림이 심했는데 하이플래너로 일하면서 성격도 바뀌었다. 그리고 사람을 믿게 됐다.

은아씨는 나주에서 시부모와 함께 산다. 3대가 모인 대가족이다. 북적북적해 즐겁단다. 그녀는 “아무도 없으니 남편 부모가 제 부모가 됐다. 그냥 엄마·아빠라고 부른다”며 미소지었다.

/나주=박정욱기자 jw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