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멋지고 매력적인 도시 모스크바에 한달 정도 머무르기 위해 나와 아내는 광천터미널에 있다. 15년 전 새벽 아들을 먼 곳으로 떠나보내야 했던 이곳이 생각난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호기심 많은 17살 아들은 새로운 꿈을 찾아 아무런 연고도 없는 러시아로 유학을 떠났었다. 그때 나는 부도로 생활이 힘들어 밤늦게까지 일에 묻혀 사느라 아들과 함께 여유롭게 한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 무엇보다 나를 고통스럽게 한 것은 충분한 사랑을 주지 못한 자책감과 부모 품을 떠나 기댈 곳 없는 머나먼 낯선 곳에서 아들이 홀로 견뎌야 할 세상살이의 벽이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려왔다.

내가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내 목숨보다 아들과의 관계가 더 소중하다는 걸 내 몸이 가르쳐 주고 있었다. 이런 나의 마음을 위로하듯 아들은 살면서 무엇이 소중한가를 아는 것 같고 지혜롭게 잘 자라 모스크바 국립대를 졸업하고 대기업 중견 간부로 성장해 15년째 모스크바에 거주하고 있다.

인천공항에서 8시간 소요로 모스크바 세레메티예보 공항에 도착해 마중나온 아들과 함께 거주지로 이동했다. 아들의 숙소 아파트는 모스크바 중심부에 위치해 내가 이번 모스크바 여행에서 가고자 하는 붉은 광장, 푸쉬킨미술관, 트레찌야코프 미술관 등이 걸어서 20∼30분 거리에 있다. 나는 아들과 언제든 통화가 가능한 핸드폰과 몇 개의 러시아어를 숙지하고 아들이 회사에 출근하면서 건네준 루블화를 가지고 유유자적 가벼운 차림으로 거리로 나섰다.

모스크바 거리의 명소나 광장에는 어김없이 다채로운 포즈로 서 있는 예술가들의 동상들과 자작나무 숲 공원들이 수없이 많다. 어마어마하게 넓은 약 4500만개의 자료를 소장한 국립레닌도서관 안에는 커다란 레닌동상이 내려다 보고 있고 도서관 앞 도스토예프스키 동상이 의자에 앉아 우울한 특유의 표정으로 광장 사람들을 보고 있다. 도서관을 나와 조금 걷다 보면 모스크바의 심장이라는 붉은 광장이 있다. 투박하면서도 거침이 없는 매력이 존재하는 곳. 러시아어로 ‘끄라스나야’(붉은)의 의미는 ‘아름다움’이다. 붉은 광장의 본래 의미는 아름다운 광장이다.

크레믈린은 모스크바의 지리와 문화의 중심이다.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크레믈린은 러시아어로 ‘도시중앙성채’를 의미하며 성벽 길이 약 2300m 높이 20m에 이르는 거대한 붉은 건축물이다.

모스크바의 랜드마크, 모스크바 상징과도 같은 성 바실리 대성당은 그 성정이 잔혹하기로 유명한 이반 4세의 의지로 지어진 건축물인데 건축가 포스트니야크 코플레프의 눈을 멀게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더 이상 이 성당의 아름다움에 필적할 만한 다른 건축물을 짓지 못하게 위함이라고 한다. 비대칭과 불균형의 조화를 잘 드러내는 바실리 사원은 보고 또 봐도 아름답고 신기하기만 하다.

휴일날 아들, 아내와 함께 현대식 건물로 치장을 한 쇼핑몰에서 구경도 하고 여유있게 차와 음식도 먹었다.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타려는데 깔끔하게 차려 입은 할머니가 다가와서 말을 건넨다. 아들이 말하기를 할머니는 러시아 거지인데 돈을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마침 쓰고 남은 동전 2개가 있어 이 돈을 줘도 되느냐고 물었다. “주세요” 하는 아들말에 아내가 우리나라 돈으로 1200원 정도의 동전을 줬다. 그런데 돈을 받자마자 생판 모르는 할머니가 무엇인가 말을 한다. 설마 조금 준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것이라고 잠시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당신이 도움을 베풀어 주어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나에게 이렇게 큰 돈을 주어도 당신이 쓰고자 하는 돈에 지장이 없겠는가?” 미안해 한다는 것이다. 작은 도움에 감사를 표현하는데 진실성이 느껴졌다. 할머니에게서는 옷차림과 몸가짐이 아주 정갈하고 정중함이 있어 불쌍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작은 돈을 얻어가면서도 상대방을 배려해주었고 동정심을 유발하는 비굴함도 없었다. 경쟁과 비교속에서 우월감에 맛들이며 사람들이 한쪽으로 치우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봐왔기 때문에 어려운 현실을 부끄럽지 않게 받아들이는 자존감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 이 오고야 말리니’(푸쉬킨)

붉은 광장에서 번화한 거리를 지나면 자유로운 영혼이 숨쉬는 ‘푸쉬킨광장’이 나온다. 이 광장에는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왼손으로는 모자를 든 채 뒷짐을 진 푸쉬킨 동상이 있다. 푸쉬킨은 당시 최고의 미인이었던 아내 곤차로바에게 구애행각을 한 단테스와 결투를 벌여 38세 아까운 나이로 죽었다. 사색적인 동상의 모습과 비극적인 개인사는 정열적인 낭만주의자의 운명은 아닐는지 생각해본다.

푸쉬킨국립미술관이 지닌 신고전주의양식 건물 외양과 수집품은 상트페째르부르크의 에르미타슈미술관 다음이다. 이집트 미술을 비롯해 유럽 각국 고 미술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어 세계 미술사적 집대성을 보여주고 있다. 모스크바에는 박물관이나 국제적인 수준의 미술관이 수없이 많다. 15만여점의 그림을 소장한 국립뜨레찌야코프미술관은 공업가 뜨레찌야코프가 40년간 수집한 그림들을 1892년 모스크바에 기증하며 생겼다. 민중의 강인한 삶과 정신적인 아름다움이 어우러진 러시아적 리얼리즘 그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일리아레핀의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을 비롯 ‘모스크바를 탈출하는 나폴레옹’ 작품을 보면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생각한다.

모스크바는 예술가의 도시이다. 수많은 예술가들의 동상들은 모스크바사람들의 예술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을 보여주는 증거인 것 같다. 지금도 순수 예술 공연들은 일상적으로 매진되고 미술관에는 길게 줄을 선다. 그만큼 예술을 사랑하고 그 예술가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억하고자 한다. 예술에 대한 그들의 애정은 또 다른 예술가의 탄생을 가능케 하는 동력이 되었을 것이고 그들은 다시 모스크바 사람들의 영혼을 어루만져 줄 것이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도시 모스크바, 그들의 정신은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으로 남는다.



*정용규

-개인전(서울·광주) 11회

-대한민국·광주·전남 미술대전 초대작가, 심사위원

-한국미협, 그룹새벽, 토만사 누드, 신작전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