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을 가리키는 시계가 갑자기 빨라지기라도 한걸까. 며칠 이른 포근한 봄 햇살로 가득했다. 좋아하는 이가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온 것처럼 반갑고 훈훈한 날들이었다. 광주시립미술관에는 이미 홍매화 꽃봉오리가 팝콘 터지듯 요란스럽다.

입춘은 벌써 지났지만 아직 겨울에 머물러 있었다. 며칠 포근했던 만큼 비가 내린 뒤 다시 찾아온 추위는 서글펐다. 아침 공기 속에 입김이 짙게 피어오를수록 더욱 깊이 봄이 그리웠다.

꽃피는 춘삼월 붉은 동백꽃 봉우리 뚝뚝 떨어져 뒹구는 계절이 오면 꼭 다시 가고 싶은 섬이 있었다. 아직 때 이른 봄이지만 진초록빛 어둑한 숲속을 밝히는 붉디붉은 동백 꽃봉오리를 찾아 배에 몸을 실었다. 섬 전체를 생화로 바닥에 흩뿌려진 붉은 낙화로, 흐드러진 붉은 감동으로 가득 채운 동백의 정원이 있는 그곳. 고산 윤선도의 무릉도원이라는 보길도.

“하늘이 나를 기다린 곳이니 이곳에 머무는 것이 족하다.”

보길도는 윤선도를 빼고 이야기할 수 없는 섬이다.

윤선도 원림에 가면 윤선도와 보길도의 인연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곧 뜻을 꺾지 않고 직신의 정신을 지켜 연이은 상소 등으로 생애 중 16년이 넘는 귀양살이의 고초를 겪어야 했던 고산. 1637년 2월, 인조대왕이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백이처럼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 캐 먹고 기자처럼 운둔하며 거문고를 타며, 관념처럼 옥탑에 앉아 절조를 지키는 것이 오직 나의 뜻이며, 육지에서 살아가는 것도 부끄럽다 하여 마침내 제주를 향해 떠난다. 항해 도중 보길도의 수려한 봉을 멀리서 보고 그대로 배에서 내려 격자봉에 올라 참으로 물외가경이라 감탄하고 이곳에 머물게 됐다.”

부용림 원림에 가면 세연정, 곡우당, 낙석재, 동천석실에 이르기까지 고산 선생의 삶이 곳곳에 투영돼 있다. 동백을 만나기 위해 먼저 달려간 곳은 방풍림으로 둘러싸여 몽돌해변으로 유명한 예송리해수욕장이다. 해수욕장 마을 뒤편으로 가는 숲길로 들었다. 숲은 온통 동백나무다.

앳된 놈은 꽃망울을 터트리기 전이고 이미 만개한 놈들은 바닥에 송이째 떨어져 뒹굴고 있다. 동백꽃 속 노란 꽃 수술은 햇살을 품어 아름답기 그지없다. 아직 쌀쌀한 음지의 숲속에는 동백꽃이 드물었다. 아직 춥다춥다 해도 봄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니 곧 이 숲도 온통 붉게 물들 것이다. 빼앗긴 들에도 어김없이 봄은 찾아오고 있었다. 때마침 날씨마저 화사하니 내 마음은 이미 봄 처녀다.

보길도는 정말 온 섬이 동백나무다. 가로수도, 집 정원수도, 심지어 개집도 동백나무 밑이다. 마을 어귀 햇살이 가득한 양지바른 곳에 수령이 꽤 오래돼 보이는 커다란 동백나무 아래 개집이 일품이다. 지붕에는 동백 꽃봉오리가 가득 쌓여 멋진 붉은 꽃 장식에 바닥은 붉은 카펫을 깔아놓은 듯 멋스럽다. 개집이 부러워보긴 처음이다. 동천석실 올라가는 길목 동백 숲이며 가는 곳곳 걷는 걸음걸음 마다 동백꽃이 사뿐히 내려앉아 있다.

마지막 코스로 아껴두었던 붉은 감동으로 가득한 동백의 정원이 있는 그곳 세연정(洗然亭). 나의 작품 중 배 이미지가 등장하는 첫 작품 ‘꽃들아! 춤을 추어라’ 시리즈 모태가 됐던 곳이다.

정원 안으로 들어서니 먼저 동백이 먼저 반긴다. 윤선도가 말년에 풍류를 즐겼다던 부용동의 세연정. 그가 이곳의 지형이 피어나는 연꽃과 닮았다하여 부용동이라 이름 짓고 부용동 정원에서도 가장 공들여 꾸며진 곳이 세연정이다. 자연적인 물길을 돌둑으로 막고 크고 작은 너럭바위들을 자연스럽게 배치해 큰 연못을 만들고 연못 사이의 인공 섬에 세연정을 놓아 주변에 다양한 경관을 누릴 수 있게 했다.

세연정 동쪽에는 동대와 서대로 불리는 네모진 무대가 있어 무희들은 춤을 추고 악사들은 풍악을 울렸다. 날씨가 좋으면 세연지 중앙에 작은 배를 띄우고, 어부사시사 시조를 읊으며 무희들이 노는 것을 바라보며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윤선도가 이런 주변 자연과 잘 어우러지는 멋스러운 개인정원에서 풍류를 즐길 수 있었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안목과 지혜, 시조와 풍류를 아는 멋스러움이 있었겠지만 선조 대대로 이 일대를 통틀어 부자였다는…. 그만한 상당한 재력이 있어 그만한 호사스런 풍류를 즐겼을 것이다.

수령이 몇 백년이 넘었을 오래된 동백나무는 무채색의 세연정 안에서 유일하게 컬러감이 들어가 어디를 둘러봐도 한 폭에 그림이다. 연못을 천천히 돌아 세연정의 맞은편에서 바라본다. 붉은 동백 숲을 병풍 삼아 휘돌아 나가는 연못에는 하늘에 떠있던 구름이 연못 속으로 들어가 앉아 있고, 널찍한 바위들은 하늘에 떠 있은 듯 자연스레 수면 위로 드러나 있고, 그 사이에 낙화한 동백꽃송이는 연목 속에서 다시 피어난 듯하다.

자연스러움이 굽이굽이 멋스럽고 단정하다. 멋들어지게 휘어진 소나무와 붉은 동백을 배경 삼아 세연정 난간에 앉아 온몸으로 봄을 맞이한다.

한참을 바람이 흐르며 빚어내는 소리에 귀 기울인다. 이곳에 머물며 며칠을 더 보냈으면 좋겠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그의 풍류를 되새김질 해본다. 어쩌랴 그의 이 호사가 부럽기만 한 것을.



꽃들아! 춤을 추어라.

악사의 풍악소리가 울린다.

너럭바위 위에선 꽃들이 너울너울 춤을 춘다

세연지 속 그림자도 너울너울 춤을 춘다.

아해들아!

주연을 열고 흥을 돋워라.

풍악을 울려라.

너희 꽃들아! 춤을 추어라.

세상을 잊고 화조풍월을 즐기며 살자구나!





*전현숙

-전남대 서양화 전공

-개인전 12회. 2010 부산비엔날레 등 다수 단체·기획전.

-2008 신세계미술제 수상. 광주시립미술관 중국 북경 창작스튜디오 1기 입주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