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티베트에는 ‘이셰다와’라는 공주가 있었다. 그녀는 10살 때 고행을 시작해 79살에 깨달음을 얻어 보살의 경지에 올랐다. 99살에 아들을 낳게 된 공주는 아들을 끔찍이 사랑했지만, 어느 날 누군가 아들을 숨겨버린다. 매일 눈물로 아들을 찾아 세상을 누비던 공주는 황금 탑 안에 숨겨져 있던 아들을 찾는다.

아들을 찾아 헤매면서 공주는 이 세상에 고통받는 중생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자식을 찾는 그 애절한 마음으로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을 보살피게 된다. 그의 이름은 산스크리트어로 ‘고통의 강을 건네주는 어머니’라는 뜻의 ‘타라’(Tara)다.

사람들의 기억을 보관해주는 ‘기억보관소’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자칭 ‘메모리키퍼’(Memory Keeper) 송재영(35)씨는 타라에 얽힌 이야기가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와 닮았다고 했다. 사람들이 자신만의 강을 건너며 탄생한 이미지와 문장, 생각의 흔적에서 글의 모티브를 얻기 때문이란다.

광주에서 작가로 활동하는 그녀가 필명을 ‘타라’와 자신의 영문이름 ‘재이’를 더해 ‘타라재이’로 지은 이유기도 하다. 누군가를 위해 고통의 강을 함께 건너는 타라보살처럼 누군가의 아픔을 덜어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그녀의 바람이 녹아 있다.

서울이 고향인 송씨는 5년 전 광주에 내려왔다. 동덕여대에서 국문학과 문예창작을 전공했지만 글 쓰는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터라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세상에 도움이 되는 글을 쓰자’고 다짐한 송씨는 광주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2012년 사회적기업 ‘더함’에서 지역 시장들을 소개하는 ‘시장신문’의 기자로 활동했고, 2014년에는 ‘더나비 프로젝트’를 기획해 독립잡지이자 웹매거진 ‘시간과 공간에 대한 방해’를 발행하면서 광주지역 예술인들을 소개해 왔다. 발산마을 공유공간 뽕뽕브릿지 개관전 스토리텔링 전시에도 참여했다.

글 쓰는 작가로 활동하던 그녀는 지난 2015년 9월 광주 대인예술야시장 별장 참여작가로 기억보관소를 운영하게 된다. 별장에 참여한 다른 팀들은 공예품 등을 가져나와 팔 수 있는 게 있었지만, 글을 쓰는 터라 딱히 팔 수 있는 게 없었던 그녀가 내놓은 아이템이었다.

송씨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글을 쓰는 것”이라며 “기억을 보관하면 짧은 문장의 글을 써주고 보관료로 두고 가고 싶은 물건을 대신 받았다”고 했다.

처음 종이 위에 손으로 글을 써주던 송씨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8만 원 짜리 중고 타자기도 구입했다. 다뤄보지도 않았던 타자기도 이제 손에 익었고, 메모리키퍼 ‘타라재이’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지금껏 많은 청년활동에 참여해 왔던 송씨지만 가장 애착이 가는 프로젝트는 단연 ‘기억보관소’다. 그저 팔 게 없어 시작한 프로젝트였으나, 광주사람들을 만나며 그들과 가까워질 수 있었고 상대방과 자신의 아픔을 치유하고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억보관소는 과거의 추억을 전해듣고 옮겨 적는 기존 인터뷰나 녹취록과 다른 형태다. 송씨는 참여자와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며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면서 그의 기억 속에 녹아들 수 있도록 노력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참여자 본인 자체가 ‘기억’보다는 ‘고민’을 가져오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수차례 만남과 대화를 반복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래야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진짜 이야기’가 나온다는 게 송씨의 설명이다.

그녀는 “대화를 나누며 상대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며 “그 과정에 참여한 나와 상대 모두, 내면에 고인 물이 흘러가듯 소통과 치유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송씨가 가장 관심 있는 기억은 ‘타인의 상처’인 이유다.

어릴 적 잦은 마찰로 아버지라는 존재가 트라우마로 남게 된 친구의 기억을 보관했던 적이 있다. 그를 위해 송씨는 친구의 기억을 토대로 소설을 썼다. 그리고 소설 속에 등장한 아버지는 딸에게 “아빠가 미안해”라고 말한다.

간혹 공황장애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던 그 친구는 지금까지 송씨의 소설을 가지고 다닌다. 아버지에 대한 과거 기억을 끄집어내고 정리해준 덕분에 그동안 쌓여 있던 ‘무엇’이 녹아내렸다고 한다. 특히, “아빠가 미안해”라는 글귀에서 큰 위안을 얻었다고 했다.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현재 괴로움의 원인을 알 수 있고 그러면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티베트 고언이 있어요.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고통의 원인, 그 기억을 더 정확히 바라볼 수 있다면 더 이상 괴롭지 않다는 뜻이죠. 작가로 성공해 돈을 벌면 좋겠지만, 단 한 사람에게라도 제 글이 치유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송씨는 ‘타라재이’라는 이름으로 150여명의 기억을 보관했다. 지난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7주기를 맞아 기억보관소를 운영하기도 했고, 지역 청년들부터 노인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동안 모은 사람들의 기억들 일부를 지난 2일부터 14일까지 동명동 A4 갤러리에 전시하고 있다.

광주의 한 학원에서 영어강사로 일하며 당장 ‘월세’ 마련에 걱정이 크지만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준 광주에 보답하고 싶다”는 게 송씨의 마음이다.

“기억보관소를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소설을 계속 써내려갈 생각입니다. 아직은 부족한 게 많지만 저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준 광주, 이제 그 보답으로 광주의 의미를 담은 글을 쓰는 지역의 작가가 되고 싶어요.”

메모리키퍼 송재영씨는 “당장의 고민이 아니라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기억들을 기록한다”며 “간혹 ‘이상한 여자’로 오해하는 분들도 있는데, 많은 분들이 기억보관소를 찾아와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기억보관소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은 ‘타라재이’ 블로그(www.taarajay.com)나 이메일(tarajay@naver.com)을 통해 신청하면 된다.

/박기웅기자 pboxer@kwangju.co.kr

/사진=최현배기자 choi@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