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그림의 시작은 우리 산하와 그 곳의 삶이다.

땅은 우리의 삶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우리나라에서의 땅은 곧 삶이다.

땅은 단순히 바라보기만 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 곳에서 뛰놀고 어우러진 흔적이 있는 대상이다. 나의 그림은 근본적으로 삶과 이를 떠 받쳐주는 고향으로서의 땅, 그 위를 끊임없이 스쳐지나가는 세월에 초점을 맞춰 왔다. 화려하거나 앞서가는 삶이나 문화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삶의 본질 혹은 토대에 관한 이야기다.

이러한 삶의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질문과 관련된 나의 그림이야기.

30여년 전 청량리에서 강원도 태백으로 가는 새벽 완행열차. 그저 막연하게 무언가를 만나기를 기대하며 떠나게 된 겨울여행이었다.

어둠을 뚫고 헤쳐 가는 기차 안에서 저 아래 멀리 보이는 조그마한 불빛들. 마치 여기에도 생명이, 삶이 존재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듯한 보일듯 말듯 하지만 어느새 또렷하게 쏘아대는 신호탄이 되고 있었다.

그 땅을 처음 내딛게 된 그 날, 새벽을 가르는 기차에서 내리자 나를 반기는 겨울비. 산도, 물도, 집도, 땅도, 사람도 모두가 새까만 태백에 비가, 검은 비가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강원도와 나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돼서 지금까지도 불현듯 아무런 망설임 없이 떠나게 되는 고향 같은 여행지이며, 내 40대의 가장 목말랐던 예술혼을 적시기에 충분했던 시간들이었다.

이제는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나의 스케치 여행지 태백, 정선, 영월, 삼척 등에서 얻어지는 예술적 영감은 계속 되고 있다.

나의 오지마을 답사 일번지인 삼척의 ‘무건리 마을’은 굽이굽이 산허리를 다섯 번은 굽이 돌아야 비스듬히 삐죽 얼굴을 보여주는 곳이다.

철저히 외면당한 흔적들로 상처받고 있을때 나의 갑작스런 붓놀림에 어이없어 했었던, 여름장마 이후 집 한 채가 없어졌을때 나의 상실감과 안타까움을 오히려 돌 한무더기와 풀 한포기로 채워주며 위로해주었던 그 따뜻함까지 오롯이 화폭에 담을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의 생명의 땅이었던 태백은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이제 더 이상 까맣게 타들어가는 외로움으로 소외된 곳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능선에 일궈진 고랭지 배추밭인 ‘바람의 언덕’ 매봉산, 그리고 귀네미 마을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일출은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다.

또한 태백에는 한강, 낙동강, 그리고 동해안으로 이어지는 오십천으로 물길이 갈라지는 근원지인 삼수령(일명 피재)이 있다.

여기에서 동쪽으로 보이는 가파르고 확 트인 백두대간의 절경은 나의 작품세계를 구축하는 한 획이 됐다.

태백에서 삼척으로 넘어가다가 통리에서 이어지는 드넓은 높은터에서는 잠깐 두 눈을 감고 큰 숨을 들이쉬고, 바람을 느끼면서 여행이 주는 선물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강원도 스케치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목은 늘 영월과 동강이다.

역사와 자연의 위대함을 함께하는 영월과 정선을 이어주는 동강. 슬픈 역사의 한을 품은 채 흐르는 물줄기에는 그저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을 감탄하기에는 너무나 암울했던 우리의 역사가 함께하고 있어서 숙연한 마음으로 동강의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어두웠던 과거의 동강도, 소외됐던 강원 산간지역도 더욱 절실하게 따뜻한 빛이 그리웠기에 이제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해 뒤돌아 앉아있는 지혜로움으로 아름다운 빛을 만들고 있다. 더불어 내 캔버스 안의 오지마을에도 따뜻한 남도의 빛을 덧칠해 본다.

2016년 겨울을 맞이하면서.



*류재웅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및 동대학원 졸업

-개인전 18회

-한국국제아트페어, 한국구상대제전 등 단체전 300여회

-조선대학교 평생교육원 강사, 광주미술협회 서양화분과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