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컹거리는 열차에서 술의 취기로 인해 몰려오는 잠을 떨쳐내지 못하고 위쪽 침대로 올라간 것이 어제였을까 아니면 날짜가 바뀌어 오늘이 된 걸까?

이르쿠츠크를 떠나며 사들고 탄 바이칼의 물로 만들었다는 몇 병의 보드카는 이미 빈병이 되어 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내다 본 창밖은 어스름한 채 어둠의 기운이 조금 남아 있는 상태다. 대체 해가 뜨고 있는 것인지 해가 지는 것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는 광활한 대지.

하지가 되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하지만 해가 떠있지 않은 시간이 몇 시간 되질 않아 시계를 보지 않고서는 시간을 가늠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시차 때문이기도 하지만 계속 서쪽을 향해 달리는 기차로 인해 가뜩이나 헷갈리는 시간이 몇 시에 일어났는지, 몇 시간 뒤면 해가 떨어지는지, 지금이 아침인지 점심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아래 칸을 내려다보니 같이 술을 마셨던 일행들은 모두 꿈나라다.

이층 침대에서 내려올 때는 자칫 얼굴을 밟을 수도 있기 때문에 무척 조심스럽다. 열차의 좁은 복도를 지나 화장실 문을 열려고 하는데 객실을 담당하는 차장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며 문을 잠근다. 한껏 불쌍한 모습으로 얼른 소변을 보고 나오겠다는 몸짓을 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문 채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는 가버린다. 이런 망할….

우리가 붙여준 그 차장의 별명은 마귀할멈. 또 한 명의 차장은 쌩콩이다. 그나마 쌩콩은 그런대로 예쁜 모습을 조금 갖고 있기도 하고 아주 가끔이지만 씨익 이를 드러내고 웃기도 했다.

각 객실 사이에는 객실을 담당하는 한두 명의 차장이 교대로 근무를 하는데 대부분이 여자다. 대개는 무뚝뚝한 표정에 말투도 건조한 데 이 마귀할멈은 건조하다 못해 사납다.

사나운 듯한 모습도 그렇지만, 생김새가 영락없이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에 나오면 딱 일 것 같은 그 캐릭터다. 우리 일행들은 5박 6일 동안의 열차 생활 중 마귀할멈의 근무 때가 되면 모두 얌전한 어린이가 되어 다소곳이 앉아있어야 했다.

때론 역에 기차가 정차하는데도 화장실 문을 잠그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경우는 거의 삼사 분을 지나지 않아 출발하는 작은 역에서만 그렇다.

10분이 넘게 정차하는 역에 기차가 들어설 땐 어김없이 20분 전부터 문을 걸어 잠근다.

이 때문에 유쾌하지 못한 여러 일들이 생기기도 한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나지막하게 입에 올리기만 해도 가슴 벅차오르는 단어.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젊은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꿈꿔 봤을만한 최고의 여행일 것이다.

러시아어로 뒤덮인 낯선 사람들과 뒤섞여 보드카에 취해 기나 긴 시간 어딘지 알 수 없는 공간을 스쳐 지나는 것은 특별한 경험일 것이리라. 아마도 사람들은 영화나 문학작품에서 등장하는 시베리아 열차에 대한 일종의 로망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데이비드 린 감독의 영화 ‘닥터 지바고’나 소피아 로렌 주연의 ‘해바라기’, 톨스토이와 도스토엡스키의 문학작품, 차이코프스키의 음악 등 러시아의 위대한 예술가들의 작품에 투영된 광활한 러시아의 대자연….

그 끝없이 펼쳐진 시베리아 벌판 위를 기적소리 요란한 기차를 타고 횡단하는 판타지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연기를 뿜어내며 달리는 열차 옆 푸르스름한 어둠 속 자작나무숲 위로는 아마도 늑대의 눈빛과도 같은 날 선 달빛이 가득 했으리라.

하지만 5박 6일 동안의 비좁고 낯설고 지루한 열차 생활은 그렇게 상상처럼 낭만적일 수만은 없다.

샤워는 고사하고 세수하는 것도 불편하기만 하다. 화장실 한 쪽에 있는 조그마한 수도는 꼭지 아래를 손으로 밀어 올려야만 물이 나오게 되어 있어서 불편하기 그지없다.

게다가 전기 사용하는 것도 쉽지가 않아서 객차 사이에 놓인 보일러의 뜨거운 물을 받아서 식사를 해결한다. 인스턴트식품에 물을 부어 먹는 것은 괜찮은데 햇반을 데워 먹거나 하려면 삼 십분 정도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한다.

사람마다 여행하는 방식은 다르겠지만, 오랜 시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사람, 익숙했던 것들과 조금 거리를 두고 싶은 사람, 기나긴 시간 아무 생각 없이 창 밖 풍경을 즐기면서 그저 멍하게 몸과 마음을 쉬게 하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기대했던 것만큼 낭만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그저 멍한 눈으로 창밖을 쳐다보니 끝없을 것 같던 자작나무 숲이 사라지고 지평선이 아스라한 평원이 펼쳐진다. 그러다 이내 늪지대가 기다랗게 이어진다. 악어만 없을 뿐이지 소름끼치는 눅눅함과 찝찝함이 느껴진다. 타이가와 늪지대 말고도 때론 메말라 보이는 들판이 나타나기도 한다. 스텝 초원인 듯하다. 가만히 앉아 지구상에 있는 모든 지역을 지나치는 기분이다.

저런 광활한 들판에 나 혼자 덩그러니 있으면 어떤 생각이 들까? 창밖을 바라보다 보면 그런 쓸데없으면서도 뭔가 재밌는 상상을 하게 된다.

푸르스름했던 창이 점차 붉게 물들면서 밝아진다. 기차는 늪지나 강을 지나고 있는 것일까? 창밖은 온통 물안개가 자욱하다.

그 안개에 반쯤 묻힌 나무며 지붕들이 쉴 새 없이 모습을 드러내고 또 이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 안개 위로 붉은 태양이 불 붙은 솜사탕처럼 몽글거리며 떠오른다.

안개가 걷히고 마알간 연둣빛 자작나무 이파리들이 햇살과 섞여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반짝인다.

일행들에게 시베리아 횡단열차 안에서의 길고도 긴 5박6일은 결코 재밌지만은 않은 여정이었으리라. 그 긴 시간 속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즐기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그저 괴롭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인생이란 것도 그럴 터이다.

각기 마음먹기에 따라 삶의 느낌은 각양각색으로 간직된다. 어찌 인생이 즐겁고 재밌기만 하겠는가? 괴롭고 힘든 일도 있을 것이고 위험한 순간들도 있을 것이다.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인생을 여행하면서 순간순간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모두 자기 마음먹기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