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 개막을 일 년여 앞둔 여름, 영화 ‘명량’이 극장가를 휩쓸었었다. 화려한 해상전투 장면이 눈길을 끌었지만, 무엇보다 관객들은 ‘리더’ 이순신에 크게 감명 받았다. 나 역시 ‘원칙’과 ‘소신’있는 이순신의 리더십에 고개를 끄덕였음은 물론이다.

승산이 없는 전투를 앞두고 병사들은 밤마다 줄도망을 쳤다. 국왕 선조마저 해전을 포기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이순신은 원칙과 소신을 갖고 정면 돌파했다. 타협하지 않는, 물러서지 않는 직진의 자세는 당시의 여러 상황들과 비교되며 ‘이순신 리더십’으로 회자되곤 했다.

개성공단이 폐쇄되며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있는 상황이다. 남측 인원을 전원 추방하고, 개성공단 입주기업의 모든 자산을 불법적으로 동결하는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며, 13년 전 기획예산처 과장 시절에 개성공단 조성사업을 맡았던 때가 떠올랐다.

개성공단 사업은 경의선 및 동해선 철도·도로 연결, 금강산 관광사업과 함께 ‘남북 경제협력 3대 중점사업’으로 추진됐다. 특히 개성공단은 휴전선과 맞닿아있는 군사지역에 건설된 평화지대로서 강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북측의 저렴한 토지와 노동력을 활용하고, 북측은 우리로부터 경제적 이득을 얻게 되는 상생의 사업으로, ‘통일의 초석’이 될 것이란 큰 기대 속에 2003년 첫 삽을 떴다.

필자는 2002년부터 2003년까지 개성공단 조성사업 담당 과장을 지냈다. 당시 북측은 개성공단 내에 전력 발전소를 지어줄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우리 정부 내에서도 일부 관계자들 사이에서 이에 동의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공단 내 발전소 건설 문제는 찬성 반대를 놓고 청와대에서도 수도 없이 논의됐다.

실무적인 검토를 하는 담당 과장으로서 몇 가지 중요한 이유에서 건설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기반 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곳에 새로 발전소를 세운다는 것은 많은 비용을 부담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재정적인 이유도 있거니와, 국가의 안위가 달린 문제이기도 했다. 평화의 상징인 사업이긴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전략적인 제어를 할 수 있는 컨트롤 키를 우리 쪽이 쥐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의 상황과 미래에 이 결정이 어떤 결과를 불러 올지 냉정하게 판단했다. 공단 내 발전소 건립 대신 개성공단과 거리상 가장 적합한 경기도 문산에 송배전 철탑을 세워 전력을 공급하는 방안을 제안했고, 결국 이 방안대로 추진됐다.

정부는 지난 11일 밤 개성공단에 대한 송배전을 전면차단했다. 한국전력공사측은 경기 파주변전소에서 원격조종을 통해 단전조치했다. 개성공단 단전은 2005년 한전 개성지사 개소와 함께 최초 송전이 시행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에 발전소를 짓지 않고 송배전으로 추진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분위기에 휩쓸려 공단 내에 전력 발전소를 세웠더라면 어땠을까. 우리 정부가 개성 공단 폐쇄를 결정했더라도, 전력발전소가 공단 내에 있는 한, 완전히 공단 가동을 멈추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정부가 ‘개성공단 가동 전면중단’ 카드를 내민 것은 수없이 심사숙고 해 나온 결정이라고 믿고 싶다. 한번 떨어진 꽃은 다시 가지로 되돌아갈 수 없다. 번복할 수 없는 정부의 결정이 북한을 제재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총선이 이제 채 두달도 남지 않았다. 예측할 수 없는 세계 경제 위기 속에 안보위기까지 설상가상의 상황에서 정치인들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혜안(慧眼)을 가지고, 원칙과 소신을 지닌 정치인들이 나라를 이끌어갈 수 있게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