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생원의 아들은 포악하고 버릇없이 자란 삼대독자다. 삼만냥을 주고 데려온 새색시는 오생원의 아들과 결혼으로 인해 고달픈 인생이 시작된다. 이성과 접촉이 없었던 삼룡이는 새색시의 인간적인 대우에 감동하고 좋아하는 마음까지 더하여 비극의 해피엔딩을 예고한다. 나도향의 소설 ‘벙어리 삼룡이’ 이야기이다.

어린 시절에 이 영화를 봤다. 새색시가 만들어 준 부시쌈지로 오해를 받은 벙어리 삼룡이는 오생원의 아들에게 피투성이로 쫓겨나 뒷산에 오른다. 말 못하는 선천의 아픔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주인에게 충직한 일꾼으로 보상받아 살아온 삼룡. 만신창이 몸이지만 새색시에 대한 애틋한 동정과 연정을 안고 뒷산 너럭바위에 앉아 옅은 밤안개와 더불어 퉁소를 부는데 구슬픈 소리와 분위기, 삼룡의 한 서린 심정이 절절하게 어우러진 그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어린 생각에도 악기 하나가 저렇게 사람의 마음을 달래고 표현할 수 있다니. 삼룡이의 짠한 처지보다는 퉁소 소리의 애절함에 반해서 나도 어른이 되면 반드시 퉁소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살아가면서 때때로 답답하거나 슬픈 마음이 생기면 퉁소를 불겠다고 다짐하면서 극장 문을 나선 것이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어제같이 선하다.

악기에 대한 꿈은 이리해서 시작되었다. 오랫동안 마음만 먹고 있다가 교직에 들어와서 단소나 대금을 만지게 되었고 지금은 아코디언과 하모니카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신통치는 않다. 학창시절 음악시간에 한 가지 악기라도 더 열심히 배웠으면, 타향살이나 동요 몇 곡으로 헤매는 나의 연주 실력이 더 확산되지 않았을까 괜히 핑계를 생각해 본다.

어릴 때의 체험이나 독서는 평생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어린 시절 남에게는 하찮게 보이는 일도 큰 느낌을 받았던 기억들 한두 가지는 있지 않는가. 감동 깊은 연수를 받거나 책을 읽으면서 메모도 하고 실천 의지를 다지지만 나이가 들면 익숙해진 일상의 습관으로 인해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이가 어릴수록 경험하고 꿈꾸는 일들은 실행으로 옮기는 확률이 높다.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어릴 적 어떤 계기로 각심을 하거나, 몸소 체험하여 꿈을 키운 경우가 아니던가. 파릇파릇 청춘들이 오갈 데 없는 이 답답한 시대에 그래도 한 가지 방법은 학생들에게 체험 마당을 더 넓혀주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제도적으로 확보해 주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올 3월부터 중학교 자유학기제가 시작된다. 명칭 자체가 매우 상징적이다. 기존의 틀이 얼마나 단단히 ‘묶인학기제’였으면 제목이 ‘자유학기제’이겠는가. 학생들은 자신의 진로나 미래의 직업에 대해 탐색해 보고, 하고 싶은 것들을 체험해 보는 기간이 될 것이고, 교사는 각 교과 특성에 따라 수업 방법 자체가 바뀌는 계기가 될 것이다. 진로가 설정되면 집중하게 되고, 학습량이 줄어들며, 많은 교내외 활동의 방향성이 잡히게 된다. 이러한 활동이 꿈의 실현 과정이며, 꿈이 있기에 좌절하지 않는다. 꿈은 뜨거운 열정을 일으키고, 열정으로 데워진 가슴은 큰 시련도 수용하게 된다.

그리고 대학입시에서 면접이나 자기 소개서의 핵심은 언제, 어떤 계기로 선택한 학과에 관심을 가졌고, 중·고 시절 어떤 노력과 활동을 했느냐이다. 그래서 자유학기제는 몇 년 후 진학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대입 원서를 앞에 놓고 내신이나 수능 점수에 맞춰 결정한 진로와는 차원이 다르다. 아울러 은퇴 후 수십 년을 또 살아야하는 장수시대의 터 닦음이기도 하다. 휴가도 일에 치이고 심신이 녹아날 정도로 업무에 시달릴 때 소중하고 꿀맛이지 일없이 연속된 휴가는 휴가가 아니라 병가가 될 가능성이 많다. 자유학기제는 자기에게 맞는 일이나 취미생활로 긴 휴가를 대비하는 기간일 수도 있다. 대한민국 인생은 국·영

·수로 시작해서 음·미·체로 끝나지 않던가.

일부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학생의 질문과 교사의 발문이 가득한 교실이 되어 자유학기제가 자유학년제로 확산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