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넘게 인연을 맺어온 한 작가는 그를 ‘오뚝이’ 같다고 표현했다. 1970년대부터 광주에서 미술 책방 ‘학문당’을 운영하고 있는 안명원(73) 사장을 이르는 말이다.

예술의 거리 터줏대감 ‘학문당’은 오랜 기간 지역 미술인들의 사랑방이었다. 미술 서적이 귀했던 시절, 작가들은 이곳에서 지적 허기를 채웠다. 컴퓨터가 세상에 나오기 전, 사람들은 책에서 모든 정보를 얻었고 ‘학문당’은 정보 창고 역할을 했다. 작가들 뿐만이 아니다. 미술, 사진 관련 서적에 관심이 있는 이들도 꼭 들르는 장소였다. 기자 역시 가끔 드나들며 미술 관련 서적들을 뒤적이고는 했다.

3년여전, 정들었던 예술의 거리를 떠난 ‘학문당’은 현재 계림동 광고 인근 헌책방 거리에서 손님들을 맞고 있다. ‘학문당’을 개업한 후 여섯번째 보금자리니, 참 무던히도 옮겨다녔다. 장소는 바뀌었지만 미술을 사랑하는 마음, 세월의 더께가 묻은 오랜 자료들은 늘 그와 함께였다.

안 사장은 옛 학문당을 기억하는 이들이 간판만 보고 문을 열고 들어와선 “아, 그 학문당이 맞군요”하며 반가워한다고 전했다.

안사장은 서적 외판원으로 미술 책과 첫 인연을 맺었다. 서울 외판 센터 한양사에서 일하던 그는 외판원 1세대라 부를 만하다. 그에게 날개를 달아준 건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12권 짜리 ‘세계미술전집’이었다. 이전에는 컬러 조판 등이 조악해해국내에서 미술 관련 책들이 많이 출간되지 않았었다. 이 책이 히트를 쳤고 미술 전집들도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 100인선도 ‘잘 나가는’ 책이었다. 서울, 광주를 비롯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책을 팔았다.

‘학문당’이 문을 연 것은 1970년대 초반 즈음이다. 첫 가게는 옛 동구청 뒷골목 영흥식당 2층이었다. 당시 광주교육대 미술대학 교수였던 명창준 교수가 소유하던 건물로 명교수는 광주 추상회화의 선구자 그룹인 ‘에뽀끄’ 회원이었다. 이 때 인연으로 고인이 된 최종섭씨를 비롯해 김종일·우제길 화백 등 에뽀끄 회원들과 오랜 인연을 이어왔다. 이후 예술의 거리 현 상계갤러리 인근으로 옮겼다 중앙초등학교 뒷편을 거쳐 원불교 옆에서 전성기를 맞았다. 이후 태평양 다방 반지하 등으로 여러 차례 옮겼지만 예술의 거리 부근을 떠나지 않았었다.

초창기에는 서점을 지키는 한편 신간 서적을 직접 들고 작가들을 방문하는 게 주된 일이기도 했다.

“작고한 남농(허건) 어르신을 자주 찾아가곤 했는데 어르신은 누구든 그대로 보내는 적이 없는 분이시라 신간을 갖고 가면 책값의 몇 배는 되는 소나무를 그려주시곤 했어요. 그 때 받은 그림들을 팔기도 했죠.”(웃음)

서점을 자주 찾았던 아산 조방원 선생의 모습도 기억난다고 했다.

“아산 선생님은 작품집이나 고미술 책도 많이 보셨지만 특히 이론 서적을 많이 읽으셨어요. 이론 서적들도 많이 구입하셨죠. 책을 보시다 안경을 머리에 올리고 좀 쉬었다 다시 또 열심히 보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가끔 법정 스님도 오시고는 했는데 해진 가사를 깨끗하게 더덕 더덕 기워 입은 모습으로 책을 둘러보시곤 했죠. 최종섭 형님도 많이 다녀가셨구요. 당시 작가들이 무슨 돈이 있었겠습니다. 책하고 그림하고 물물 교환도 하고 그러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우제길(75) 화백은 광주상고 교사로 재직할 때 안사장에게서 화집을 월부로 사고는 했다고 말했다.

“학문당이 예술의 거리를 떠난 건 참 아쉽죠. 문화전당도 들어선 지금 학문당이 좋은 화랑들과 함께 광주 문화를 지켜가는 역할을 했으면 좋은 텐데 그게 안타깝기는 해요. 하지만 지금도 미술 서적과 함께 하는 걸 보면 미술인으로 참 고맙고, 감사할 일이죠.”

화가 강남구(53)씨는 안 사장을 ‘마음이 따뜻한 이’로 가슴에 담고 있었다.

“20대부터 드나들기 시작했으니 참 오래됐죠. 작가들에게 애정을 많이 주고,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시곤 했어요. 작가들 소품이라도 한점씩 사주시려고 하고, 가난한 작가들에게 책도 그냥 주기도 했죠. 명절 때면 가만히 용돈을 쥐어 주시기도 하셨어요. 학문당 역사는 곧 지역 미술 서점의 역사이기도 해요. 요즘처럼 서점이 어려운 상황에서 학문당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게 신기하기도 합니다. 화가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소중한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학문당’을 취재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평범한 회사원이자 아마추어 사진가 A씨가 들려준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당시 삼복서점은 신간이나 일반 서적을 사기 위해 찾았다면 학문당은 미술, 사진 관련 책을 보기 위해 찾았죠. 잡지 등을 우선적으로 봤는데 일본 사진 잡지에는 ‘헤어 누드’도 가끔 실려 있었어요. 사방 벽에 빽빽이 꽂혀 있는 대가들의 화집과 사진집을 보는 것도 큰 기쁨이었어요. 주인과 안면을 튼 후에는 주인이 서점 문을 닫을 즈음 지인과 팔보채를 안주 삼아 벌인 술자리에 끼어 술잔을 받기도 했습니다. 지금이나 당시나 광주에 사진 전문 책방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관련 책들을 그곳에서 볼 수 있었어요.”

A씨는 리얼리즘 사진에 관심 많아 최민식 작가의 책을 많이 구입했고 당시 국내에서 10만부가 팔리며 화제가 됐던 미야자와 리에의 누드 사진집 ‘산타페’를 거금 2만 8000원을 주고 구입하기도 했다며 웃었다.

현재 학문당은 예술의 거리 시절보다 규모가 줄기는 했지만 책장을 많이 들여놓아 진열된 책들은 꽤 많다. 유명 화가의 화집, 대한민국 미술대전 화집 등 다양한 책들과 함께 수년전 발간된 오래된 책들도 빼곡하게 꽂혀 있다.

서가 곳곳에 최종섭·김용복·주철우 작가 등 많은 화가들의 작품이 걸려 있다. 지금도 가끔 들러 담소를 나누고 인근 추어탕 집에서 점심을 사주고 가곤 하는 강연균 화백이 연필로 그린 안사장의 작은 초상화도 눈에 띈다.

현재 학문당은 알라딘과 제휴, 온라인 판매(www.artmisul.com)를 겸하고 있다.

“1960∼70년대 홍수처럼 쏟아졌던 화집과 전집은 더 이상 재발행을 하지 않기 때문에 희귀본이 됐어요. 누군가에게 필요하지 않는 책과 자료가 누군가에는 꼭 필요한, 더 없이 중요한 자료일 수 있습니다. 그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싶어요. 그래서 아주 얇고 작은 오래된 자료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고객의 요청이 있으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찾아주려고 애를 씁니다.”

얼마 전 한 손님에게서 40년전 동경대에서 발간된 ‘한국건축예술’ 책자를 구입할 수 있냐는 요청을 받고 어렵사리 구해주자 그에게서 감사의 메일이 왔다. 안 사장은 “그런 게 바로 나의 행복이고, 학문당의 존재 이유”라고 말했다.

안사장은 계림동으로 이사를 온 후 인근 유명한 헌책방이 1t 트럭으로 오래된 책을 폐지처럼 처분하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학문당이 보유하고 있는 오래된 자료와 책들이 그냥 사라져 버리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나이에 비해 남들보다 일찍 컴퓨터를 시작했던 그는 수많은 자료를 모아 놓은 야후 블로그가 문을 닫으면서 학문당의 역사가 담긴 자료가 모두 사라져 버린 걸 못내 아쉬워했다.

“제 나이 이제 일흔 중반입니다. 애들도 다 크고 뭔 돈이 필요하겠어요. 무료 나눔은 못하고, 재능도 없지만 보람을 갖고 오랫동안 미술 서적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학문당 벽면에는 오래전 운암 조용민 선생이 써준 액자가 걸려 있다. ‘美術文化 暢達(미술문화창달)’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학문당과 딱 맞춤한 글귀였다.

/김미은기자 mekim@kwangju.co.kr

/사진=김진수기자 jeans@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