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110년 기독병원
2015년 11월 04일(수) 00:00 가가
가난·질병 신음하는 조선인에 인술 … 광주 현대의료 산 역사
1961년 광주제중병원 모습과 앰블런스로 쓰이던 자동차.
“물약, 가루약, 외용약, 수액과 모든 약품을 선반에 진열했습니다. 우리는 11월20일(1905년) 오후에 진료소 문을 열었습니다. 첫날에는 환자 9명과 20여명의 구경꾼들이 모였습니다. 아주 못생긴 어떤 사람은 결혼할 수 있도록 자기의 얼굴을 고칠 수 있는 약을 달라 요청했습니다. 조선 사람은 유머 감각이 많아서 웃음보를 건드리면 그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광주 제중원 초대 원장을 지낸 노라노 박사(Dr.J. W Nolan)가 1906년 미국으로 보낸 편지에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환자들은 자기 얼굴을 의사 얼굴에 바짝 들이대고 말을 해야만 의사가 이해하는 줄 알고 ‘아파치족이 전쟁을 하는 것같은 무서운 소리’를 내면서 “다리에 쥐가 나고”, “피부에 바람이 들고”, “배에 자라가 들었다”고 하소연했다. 손가락이 떨어져 나간 나병환자도, 6살이 될 때까지 머리를 감기거나 목욕을 시켜준 일이 없어 두피가 화농성 부스럼으로 엉망이 된 아이들도 모두 그의 치료를 받았다.
‘근대 문화의 보물창고’로 불리는 양림동을 걷다 보면 낯선 이름을 딴 장소들이 있다. 호랑가시나무 옆 우월순 사택, 선교사 묘역으로 가는 길의 포사이드 산책로 등은 선교사로, 의료인으로 광주 사람들과 애환을 함께했던 이들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광주 기독병원이 올해로 개원 110년을 맞았다. 1905년 ‘광주 제중원’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기독병원의 역사는 광주 현대 의료의 역사이기도 하다.
10월 말 찾아간 병원은 새로운 모습이었다. 최근 리모델링을 마친, 세련된 외관의 신관은 쾌적했다. 에스컬레이터로 이어진 동관 로비로 들어 서니 기독 병원의 역사를 말해주는 작은 갤러리가 인상적이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제중원(濟衆院)이라는 이름이 박힌 주춧돌이다.
기독병원의 시작은 양림동 선교사 사택으로 사용되던 조그만 기와집이었다. 현재 광주사직도서관 옆이다. 제중병원이 신축된 건 1911년 2대 원장 우월순 박사(Dr.R.M.Wilson) 시절이다. 1909년, 처음으로 한센병 환자를 치료했고 1912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센병 환자 요양원인 광주 나병원을 개설했다. 1923년에는 지역 최초의 치과가 개설됐고, 1930년 3대 부란도(Dr.L.C.Brand) 원장이 취임한 후에는 ‘망국병’으로 불리던 결핵 환자 치료에 온 힘을 쏟았다.
1940년, 일제에 의해 선교사들이 추방되면서 병원도 폐쇄된다. 5대 원장 고허번(Dr.H. A. Codington) 박사가 다시 재개원 한 게 1951년이다.
기독병원의 역사를 더듬다 보면 우월순 병원장, 간호사 서서평(Miss E.J.Shepping) 등 ‘한국 이름’을 갖고 살며 ‘한국 사람’들을 온 정성으로 간호했던 의료 선교인들을 만날 수 있다. 국내 의료진이 병원장을 맡은 건 지난 1976년 허진득 원장이 처음이다.
취재 전날, 병원에 반가운 이들이 다녀갔다. 7대 원장을 지낸 이철원 박사 (Dr.R.B.Dietrick)의 가족들이었다. 1961년부터 1985년까지 기독병원에서 근무했던 그는 올 1월 세상을 떠났다. 광주 명예시민이기도 한 그는 가족들에게 “광주 양림동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고, 지난 27일 양림동 선교사 묘역에 안장됐다.
서관에 위치한 ‘역사 의학 자료 전시관’에 들어섰다. 귀한 사진 자료들이 벽면을 메우고 있다. 1910년부터 현재까지 기독병원의 모습, 1950년대 초반 환자가 너무 많이 밀려들어 미군 부대 군용 막사로 임시 병실을 마련한 모습, 대바구니 침상에 누운 아과 병동 아이들, 1930년대 수술 모습까지 110년의 역사가 오롯이 숨쉬고 있다. 1920년대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 휠체어 등 옛 의료 장비도 눈에 띈다.
병원 뒷쪽으로 돌아나오면 작은 소공원을 만날 수 있다. 우월순, 포사이드 의사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5층 건물과 나란히 선, 심상치 않은 모습의 대형 굴뚝이 눈에 띈다.
언젠가 이 굴뚝이 100년의 역사를 갖고 있고, 한센인들과 결핵 환자들의 옷가지를 태우는 등 아픈 역사가 담겨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동행한 홍보실 직원에게 확인했다. 와전된 이야기였다. 1960년대 즈음 조자룡 건축가가 설계한 굴뚝이라는 설명이었다.
건축학적으로 의미가 있어 건축 관계자들이 많이 다녀간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지난 곳은 숱한 이야기가 쌓이고 또 쌓인다. 굴뚝에 대한 이야기도 아마 그리 전해지지 않았나 싶어 미소가 지어졌다.
100년이 넘은 사진 자료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건, 당시 선교사들이 카메라를 지니고 있었던 덕이었다. 그 때 촬영한 사진들은 지금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귀한 자료가 됐다. 1980년 광주항쟁 당시 의료진들은 수많은 부상자들을 밤낮 없이 치료했고 재활을 도왔다. 당시에도 선교사들이 많은 사진을 찍었지만 귀국 당시 공항에서 모두 빼앗겨 기독병원에 남겨진 5·18 관련 사진은 몇장에 불과하다.
기존 역사의학 자료실에 전시된 사진과 물품들은 신관 1층에 오는 20일 문을 여는 ‘제중문화관’으로 옮겨져 사람들을 만난다. 광주 현대 의료, 지역 선교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의미있는 공간이자, 앞으로 많은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양림동 여행의 또 다른 출발점이 될 듯하다.
100년전 작은 기와집 1차 채에서 9명의 환자를 치료하며 시작된 광주 기독병원은 현재 540개 병상, 29개 진료과, 직원 800여명이 근무하며 하루 2000여명의 외래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기독교 병원을 둘러보면서 지금까지 진행한 시리즈 중 가장 글이 적은 시리즈가 될 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떤 글보다도 생생한 사진들 속에 더 많은 사연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진 속에 담긴 숱한 이야기 속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김미은기자 mekim@kwangju.co.kr
/사진=최현배기자 choi@kwangju.co.kr
‘근대 문화의 보물창고’로 불리는 양림동을 걷다 보면 낯선 이름을 딴 장소들이 있다. 호랑가시나무 옆 우월순 사택, 선교사 묘역으로 가는 길의 포사이드 산책로 등은 선교사로, 의료인으로 광주 사람들과 애환을 함께했던 이들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10월 말 찾아간 병원은 새로운 모습이었다. 최근 리모델링을 마친, 세련된 외관의 신관은 쾌적했다. 에스컬레이터로 이어진 동관 로비로 들어 서니 기독 병원의 역사를 말해주는 작은 갤러리가 인상적이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제중원(濟衆院)이라는 이름이 박힌 주춧돌이다.
1940년, 일제에 의해 선교사들이 추방되면서 병원도 폐쇄된다. 5대 원장 고허번(Dr.H. A. Codington) 박사가 다시 재개원 한 게 1951년이다.
기독병원의 역사를 더듬다 보면 우월순 병원장, 간호사 서서평(Miss E.J.Shepping) 등 ‘한국 이름’을 갖고 살며 ‘한국 사람’들을 온 정성으로 간호했던 의료 선교인들을 만날 수 있다. 국내 의료진이 병원장을 맡은 건 지난 1976년 허진득 원장이 처음이다.
취재 전날, 병원에 반가운 이들이 다녀갔다. 7대 원장을 지낸 이철원 박사 (Dr.R.B.Dietrick)의 가족들이었다. 1961년부터 1985년까지 기독병원에서 근무했던 그는 올 1월 세상을 떠났다. 광주 명예시민이기도 한 그는 가족들에게 “광주 양림동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고, 지난 27일 양림동 선교사 묘역에 안장됐다.
서관에 위치한 ‘역사 의학 자료 전시관’에 들어섰다. 귀한 사진 자료들이 벽면을 메우고 있다. 1910년부터 현재까지 기독병원의 모습, 1950년대 초반 환자가 너무 많이 밀려들어 미군 부대 군용 막사로 임시 병실을 마련한 모습, 대바구니 침상에 누운 아과 병동 아이들, 1930년대 수술 모습까지 110년의 역사가 오롯이 숨쉬고 있다. 1920년대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 휠체어 등 옛 의료 장비도 눈에 띈다.
병원 뒷쪽으로 돌아나오면 작은 소공원을 만날 수 있다. 우월순, 포사이드 의사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5층 건물과 나란히 선, 심상치 않은 모습의 대형 굴뚝이 눈에 띈다.
언젠가 이 굴뚝이 100년의 역사를 갖고 있고, 한센인들과 결핵 환자들의 옷가지를 태우는 등 아픈 역사가 담겨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동행한 홍보실 직원에게 확인했다. 와전된 이야기였다. 1960년대 즈음 조자룡 건축가가 설계한 굴뚝이라는 설명이었다.
건축학적으로 의미가 있어 건축 관계자들이 많이 다녀간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지난 곳은 숱한 이야기가 쌓이고 또 쌓인다. 굴뚝에 대한 이야기도 아마 그리 전해지지 않았나 싶어 미소가 지어졌다.
100년이 넘은 사진 자료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건, 당시 선교사들이 카메라를 지니고 있었던 덕이었다. 그 때 촬영한 사진들은 지금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귀한 자료가 됐다. 1980년 광주항쟁 당시 의료진들은 수많은 부상자들을 밤낮 없이 치료했고 재활을 도왔다. 당시에도 선교사들이 많은 사진을 찍었지만 귀국 당시 공항에서 모두 빼앗겨 기독병원에 남겨진 5·18 관련 사진은 몇장에 불과하다.
기존 역사의학 자료실에 전시된 사진과 물품들은 신관 1층에 오는 20일 문을 여는 ‘제중문화관’으로 옮겨져 사람들을 만난다. 광주 현대 의료, 지역 선교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의미있는 공간이자, 앞으로 많은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양림동 여행의 또 다른 출발점이 될 듯하다.
100년전 작은 기와집 1차 채에서 9명의 환자를 치료하며 시작된 광주 기독병원은 현재 540개 병상, 29개 진료과, 직원 800여명이 근무하며 하루 2000여명의 외래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기독교 병원을 둘러보면서 지금까지 진행한 시리즈 중 가장 글이 적은 시리즈가 될 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떤 글보다도 생생한 사진들 속에 더 많은 사연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진 속에 담긴 숱한 이야기 속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김미은기자 mekim@kwangju.co.kr
/사진=최현배기자 choi@kwangju.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