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잎과 단풍잎이 조금씩 물들기 시작하는 요즈음, 광주 양림동은 가장 걷기 좋다. 이장우 가옥과 최근 문을 연 한희원 미술관, 모퉁이 낡은 한옥집을 개조한 광주1930 랩, 그리고 최승효 가옥까지 이어지는 길은 사람들이 가장 흥미로워하는 공간이다. 대개의 반응은 “어, 광주에 이런 곳이 있었네.”다.

양림동에 자주 가는데도 이장우 가옥을 방문할 기회는 좀처럼 없었다. 가장 좋은 계절, 이장우 가옥을 둘러봤다. 그것도 25년간 이 집에서 살았던 주인장과 함께였다. 인터넷 자료, 문화 해설사들이 들려주는 것과 다른 이야기를 듣고 싶어 직접 청을 넣었다. 현재 이장우 가옥의 소유주는 동신대 재단. 김필식 동신대 총장이 길라잡이가 돼주었다. 제대로 된 호사였다.

김 총장은 1966년 시집와 25년 간 이 집에서 살았다. 시아버지이자 동강학원 설립자인 이장우(1919∼2002) 박사가 1959년 매입한 한옥의 원주인은 정병호씨다. 그가 안채와 대문간을 건축했고, 이씨가 사랑채와 행랑채, 곳간채를 완성해 현재의 모습이 됐다. 이 중 안채는 1989년 광주시 민속문화재 제1호로 지정됐다.

한옥의 나이는 올해 116살이다. 김 총장의 안내로 올라 선 안채 대청마루 대들보에 ‘광무 3년’(1899)에 상량식을 했다는 글씨가 적혀 있다.

“아버님이 이 집을 오랫동안 사고 싶으셨다고 해요. 집 터가 좋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네요. 이 집 뒷동산에 올라 한옥을 내려다 보며 ‘이 집을 사야지, 사야지’ 하셨답니다. 언젠가 지관이 와서 큰 자손이 날 터라고 한 적이 있어요. 그 중에서도 저 곳이 진짜 명당이라고 하대요(웃음) ”

김총장이 가리킨 곳은 안채 뒷쪽 툇마루 바로 앞 햇볕 잘드는 공간이었다.

집은 다양한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뒷쪽 동산까지 합하면 3300평 규모다. 본격적인 구경이 시작됐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게 안내판 옆에 서 있는, 몸통이 텅 빈 ‘속 빈 감나무’다. 먹음직스런 대봉이 달린 감나무에 누군가는 ‘어머니 감나무’라는 애칭을 붙여줬다. 속이 문드러지고 썩어내려도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처럼, 속은 비었어도 뭉텅뭉텅 감을 키워낸다는 의미란다.

지금은 다음 스님이 기거하며 ‘윤회매’ 작업을 하는 사랑채 앞에는 독특한 모양의 작은 연못이 있다. 지금은 말라버린 연못 안에 들어앉은 커다란 거북이 조각이 인상적이다. 관리인이 기거하는 행랑채 옆 중간 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과 안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안채는 ㄱ자 형태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왼쪽부터 툇마루 건넌방, 대청, 안방, 부엌이 있고 꺾인 곳에 작은방이 배치돼 있다.

대청 마루 문을 다 열어 놓은 안채는 따사로운 가을 햇빛이 드리우고 있었다. 앞마당 쪽 마루에 앉아 뒤쪽 툇마루를 통해 내어다본 풍경도, 작은 툇마루에 앉아 바라보는 뒷동산 모습도 아름답다. 설날, 보름, 추석이면 김 총장이 절을 올리던 작은 관음상도 눈에 띈다. 안채 곳곳엔 시경 박익준(1910 ∼1993) 선생의 그림이 걸려 있다.

예전에는 아침에 일어나 대청 마루에 서면 무등산이 한 눈에 보였다고 한다. 아쉽게도 지금, 그 풍광은 사라졌다. 안채 앞 넓은 정원은 예전과 완전히 바뀐 공간이다. 일본풍으로 꾸며져 있던 곳을 2013년 광주 디자인비엔날레 때 한국식 정원으로 꾸미고, 흙마당으로 바꿨다. 당시 화장실도 새로 만들었다.

“본채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어요. 못 하나도 안 박았습니다. 너무 불편해 부엌만 고쳤죠. 가끔 집에 오는 이들이 대패로 벗겨내고 니스칠을 해 좀 깔끔하게 만들면 어떻겠냐고 하면 남편(이상섭 전 동신대 총장)이 ‘저런 무식한 사람들이 없다’고 말하곤 했죠. 수세미에 양잿물 묻혀 일하는 사람들이 바닥을 닦느라 고생도 많았죠.”

안채 모퉁이 건넌방 마루도 인상적이다. 마룻바닥 두 개가 열리도록 돼 있고, 뚜껑을 열면 아래로 깊은 공간이 나온다. 5·18 당시 마룻바닥을 들추고 사람들이 숨어들기도 했다. 또 이 곳은 김총장의 동생인 김황식 전 총리가 고시에 합격하고 광주에서 시보로 활동할 때 지내던 방이기도 하다.

현재 나무들로 울창한 뒷동산은 원래 대밭이었다. 광주의 까마귀들이 다 나갔다 저녁이면 돌아오는 곳이라고 할 정도로 까마귀가 많았다. 대밭을 베고 이곳에 다양한 나무를 심었다. 정원수들은 모두 동신중·고, 동신대 등 동강학원 산하 각 학교로 보내져 학교를 가꾸는 데 사용됐다. 이곳은 한 때 전남대 농대생 실습장으로도 활용돼기도 했다. 당시 접하기 어려운 희귀 꽃나무들을 몰래 몰래 끊어가는 이들이 많아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다.

붉은 벽돌 굴뚝을 타고 올라가는 담쟁이 넝쿨이 예쁘다. 붉게 물들어 가을을 가장 먼저 알리는 담쟁이는 김 총장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기도 하다. 담쟁이 넝쿨로 휘감긴 벽 바로 옆에는 우물이 있다. 예전에는 바로 곁에 자그만한 유리 온실도 있었다

쪽문을 열고 나가면 넓은 녹지가 나오고, 길은 뒷동산으로 이어진다. 풀과 나무가 울창해 예전에는 뱀들이 많았던 곳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있는 200년된 팽나무가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는다. 계절 따라 라일락, 수국, 석류가 지천인 여긴 무등산이 보이는 명당 자리다. 돗자리 깔고 앉아 바람 맞으며 음악 듣고, 책 읽으면 딱 좋겠다 싶은 공간이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 이곳을 광주의 영빈관처럼 쓰자는 말을 많이 했어요. 예전에도 외국이나, 외지에서 온 손님들은 모두 다녀가고 그랬죠. 20여년전 이곳을 떠난 후 이장우 가옥을 개인 소유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시민들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같이 쓰는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민 모두가 주인입니다. 외부 사람들에게 개방하는 데 전혀 개의치 않아요.”

이날은 가옥 구경을 온 이들이 많았다. 대청 마루에 편히 앉아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고, 집안 이곳 저곳을 꼼꼼히 둘러보는 모습들이었다. 누군가가 김 총장에게 말했다. “덕택에 저희가 호강합니다. 고맙습니다. 외지에서 사람들 오면 꼭 데려옵니다. 요즘 이런 정서를 느낄 수 있는 곳이 없잖아요.”

송새벽·이시영이 주연을 맡은 영화 ‘위험한 상견례’ 촬영했던 이곳은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오는 24일에는 ‘열정의 백미’ 플리마켓 행사가 열린다. 어쩌면 옛날 장터같은 느낌이 들듯 하다.

이 가을, 양촌길 21번지 ‘이장우 가옥’에 꼭 한번 들러보시라. 문 여는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행여 대문이 잠겨있다면 바로 옆 쪽문을 통해 들어서면 된다.

/김미은기자 mekim@kwangju.co.kr

/사진=최현배기자 choi@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