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기억나는 아이가 있어요. 한 아이가 그림 그리는 시간만 되면 ‘나는 싫어, 나는 안해’하며 우는 거예요. 아이는 그냥 마구 원을 그리거나 색칠하면서 자유롭게 그리고 싶은데 엄마가 자꾸 집은 이렇게, 산은 저렇게 그리라고 하니 스트레스를 받은 거죠. ‘선생님이랑 함께 그릴까’ 하면서 아이와 똑같이 그림을 그리니까 너무 좋아하더라구요, 미술대회에서 1등상도 받고 그랬죠. 또 어떤 아이가 사과를 까맣게 그렸어요. 아이들이 놀려대니까 막 울어요. 왜 사과가 까맣냐고 물었더니 한밤중에 봐서 그렇대요. 정말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니 아이들도 놀리지 않더군요. 아이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거죠. 아이들 개성을 중시하는 게 필요합니다.”

조용한 말투의 노(老)원장은 아이들 이야기만 나오면 금방 얼굴에 환한 미소를 보이며 웃음을 터트렸다. 1940년대 평안북도 삭주 유치원을 시작으로 1989년 광주 중앙유치원 원장으로 퇴임할 때까지 50여년간 유아들과 함께 해온 김 신길 전 원장(91)이다.

우리나라 첫 유치원은 1909년 대한제국이 함경북도 청진시에 세운 나남유치원이다. 광주시교육청 자료에 따르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유치원은 1920년 4월 1일 설립된 광주중앙유치원이다. 이어 1952년 동명유치원과 소화유치원이 개원했고 프란치스카 유치원(1970년), 월산 성모유치원(1971년)이 문을 열었다. 대부분 교회와 성당 부설 유치원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광주신생유치원은 광주 최초의 여의사 현덕신씨가 설립한 곳으로 인기가 높았다. 시 교육청 자료에 의하면 현재 광주 지역 유치원 수는 모두 306개다. 이중 병설유치원이 126개, 사립유치원이 180개다.

광주중앙유치원은 광주 예수교회와 동아일보에서 주최한 자선음악회의 수익금으로 웰슨 선교사가 세운 광주유치원에서 출발한다. 1950년 중앙교회 이름을 따 광주중앙유치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광주시 동구 금남로 자리를 꾸준히 지켜온 중앙유치원은 지난 2003년 교회가 화정동으로 이사하면서 보금자리를 옮겼다.

지난 3일 오후 늦게 찾은 화정동 중앙유치원에서는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가장 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종일반 아이들이었다.

중앙유치원의 역사는 곧 광주유치원의 역사다. 문경희(46) 원장의 안내로 살펴본 옛날 자료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일제 강점기 쇼와13년(1938년) 원생 명부였다. 조심히 다루지 않으면 부스러질 듯한 자료를 한장 한장 넘기는데 명부 마지막에 적힌 시간표가 흥미롭다. 월∼토요일까지 수업은 30분씩 5교시로 진행된다. 2교시와 4교시는 항상 운동 시간이다. 동화, 국어, 산술, 율동, 수공(手工), 사물(思物), 유희(游戱) 시간이 눈에 띈다. 최흥종 목사와 독특한 옷차림의 졸업생 6명이 함께 찍은 광주유치원 제1회 졸업식 사진도 인상적이다.

1960년대∼1980년대 졸업 앨범들도 흥미롭다. ‘꽃도 새도 예쁘다. 너도 나도 예쁘다. 동무들아 오너라. 노래하며 춤추자. 우리 우리 모여 노는 중앙유치원’ 원가와 ‘물같이 맑게, 대같이 곧게, 눈같이 깨끗하게’라는‘우리의 책임’도 눈에 띈다.

초창기 유치원 행사 중 빠지지 않는 게 어머니들까지 초대해 진행한 생일잔치와 어머니날 행사였다. 또 금남로에서 열린 어린이날 시가행진에도 자주 참여했다. 현장학습도 유행이었다. 광주역과 사직공원 수영장, 소방서 등은 단골 코스였다. 요즘에는 갯벌체험, 도자기 체험, 도자기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단체 앨범은 1990년대부터 개인앨범으로 대체됐다. 1년 동안 아이의 다양한 활동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학부모들의 요청이 있어서다.

중앙유치원 졸업생은 2014년 현재 5838명 달한다. 초창기 수십명이었던 원생은 현재 5∼7세 9학급, 200명이며 교사는 15명이다. 기독교인은 20∼30% 정도 수준. 역사가 오래되다 보니 부모가 다녔던 유치원을 아이가 다니는 경우도 많다.

이후 맞벌이가 늘어나면서 유치원이 급증했고 오전 9시∼12시까지 진행되는 수업과 함께 종일반도 등장했으며 예전과 달리 아빠들이 참여하는 행사도 많아졌다.

문원장의 소개로 8일, 요양원에 머물고 있는 김신길 전 원장을 만나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평안남도 안주 출신인 김 전 원장은 만주 봉천보육학교를 나왔다. 삭주 유치원, 평양유치원을 거쳤고 월남 후 신생유치원, 동명유치원에서 근무했다.

“신생유치원에 있을 때 광주극장에서 발표회를 두번 했는데 정말 많은 사람들이 왔어요. 그 때 사람들이 유치원에 대한 관심들을 갖기 시작했죠. 중앙유치원에 와서도 한차례 극장에서 공연을 가졌는데 이후에 “우리 아이 좀 넣어달라”는 이야기들을 많이들 하셨어요.”

당시 유치원은 ‘있는 집’ 아이들이 다니던 곳이었다. 중앙유치원이 있던 금남로 주변 부호 부잣잡 아이들과 현준호 손자 등이 다녔다. 현준호 별장은 아이들의 나들이 코스이기도 했다.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노래하고, 율동하고, 이야기하고, 그림 그리는 게 주된 활동이었다. 1976년 처음 공립 유치원이 세워지면서 문교부에서 6개 영역 교과 과정을 담은 책자를 무료로 배부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유아 교육이 시작됐다.

김 전 원장이 들려준 또 다른 이야기. 친구들을 자꾸 때리는 아이가 있었다. 맞은 사람 손들어보라고 했더니 아이들 대부분이 손을 들었다. “어떻게 할까?” 물으니 “유치원에 나오지 마라고 해라. 감옥소에 보내라. 때려주라” 말들이 많았다. 그 때 한 아이가 말했다. “선생님 내가 친구 해 줄게요.” 말썽쟁이 아이는 울음을 터트렸고 김 전원장이 두 아이를 안아주며 칭찬하자 다른 아이들이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친구할래요.”

91세 노 원장은 말했다. “아이들 교육에서 제일 중요한 건 아주 어릴 때부터 아이들의 인격을 존중하는 겁니다. 유치원 교육에서부터 그게 이루어져야해요. 요즘에는 그저 아이들을 보호하려고만 하지 존중할 줄은 모르는 것같아요.”

학부모, 교육자는 물론이고 아이를 함께 키우는 대한민국 사회 모두가 새겨야할 말이다.

/김미은기자 mekim@kwangju.co.kr

/사진=최현배기자 choi@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