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시절, 신문지 수십장을 버려가며 연습을 했지만 화선지를 앞에 두면 손이 덜덜 떨렸다. 연필 글씨는 못쓰는 편이 아닌데 붓글씨는 영 재주가 없는지 많이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먹 향기는 참 좋았다. 무엇보다 먹을 갈 때의 그 느낌이 좋았다. 서예는 오랫동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집안에 붓글씨로 상 받은 이 하나 없는 집이 없었다. 우리집도 ‘국전에 입선’한 가까운 친척이 붓글씨를 선물하곤 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글씨 쓰기 하면 캘리그래피를 떠올리지만 아주 오랜 세월 그 중심에는 서예가 있었다. 올해로 40년이 된 학정서예연구원은 광주 지역을 넘어 전국 서예원의 대명사다. 한 건물(동구 금남로 전일빌딩)에서 20년 가까이 살았던 터라 오며가며 항상 눈길이 머무는 곳이었다. 지금은 광주일보도, 학정서예원도 모두 그 자리를 떠났다.

지난 2012년 학정서예원은 전일빌딩에서 100m 정도 떨어진 광주 동부서 뒷쪽 건물 2층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난 9일 오후 5시 즈음 찾은 서예원은 고요했다. 글씨 쓰기에 몰두하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 지긋한 연세의 어르신들이다.

학정 서예연구원은 국내 서예계의 큰 어른 학정(鶴亭) 이돈흥(71·국제서예가협회 회장) 선생이 글씨를 쓰며 후학들을 가르치는 곳이다. 출발은 지난 1975년 호남동 성당에 연 학정서실이다. 당시 김안당 신부가 호남동성당에 문교부 허가를 받아 전국 최초의 한문학원인 호남 한문학원을 열었고 이 때 따로 서예반을 만들었다. 전일빌딩으로 옮긴 건 1980년 3월. 이후 30년 넘게 전일빌딩에 둥지를 틀었다.

원생들이 글을 쓰는 곳을 지나 이 선생의 방에 들어서면 한쪽 벽에 ‘일심(一心)’ 두자가 적힌 액자가 걸려 있다. 문외한이 봐도 아우라가 느껴진다. 이 선생의 스승 송곡(松谷) 안규동 선생(1901∼1987)의 글씨다. 1973년 집에 찾아온 송곡 선생이 써 준 이 한마디를 학정이 늘 마음에 새기고 있다.

올해로 서예 인생 50년이다. 전남대 섬유공학과 1학년에 재학중이던 1966년 교장 선생님이었던 부친의 권유로 송곡 문하에 들어갔다. 1961년 송곡 선생이 문을 연 ‘광주서도원’은 수많은 서예가를 길러낸 요람이었다.

서예원의 전성기는 1980년대였다. 당시 학원협회에 등재된 서예원이 70∼80개에 달했지만 지금은 절반 가량으로 줄었다. 학정 서예원 역시 한달 신입 회원이 100명을 넘을 때도 있었다. 당시에는 초중고생을 비롯해 주부, 회사원 등 다양한 계층이 글씨를 배우러 왔다. 무엇보다 대학생들이 많았다.

“예전에는 취미 활동이 다양했죠. 특히 정신 수양, 예술, 전통 이 세가지가 어우러진 서예는 필수 교양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누구나 붓글씨를 했죠. 식자가 갖춰야할 지식의 척도이기도 했구요. 예전에는 대학생 회원들이 참 많았고, 취미로 글을 써도 참 열심이었죠. 서예와 함께 성장했다고 할까요.”

지금도 조선대 한문학과에서 매주 3시간씩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이 선생은 “글씨를 쓰는 건 진득해야하는데 컴퓨터 문화, 스마트폰 영향으로 차분히 글을 쓰는 젊은이들이 많이 줄어든 점이 아쉽다”고 했다.

학정서예원과 떼어 놓을 수 없는 게 서예원 출신들로 구성된 ‘연우회(硯又會)’다. 벼루, 갈다, 파고 들고 깊게 연구하다는 뜻을 갖는 한자 ‘연(硯)’은 글씨 쓰는 이들에게 안성맞춤인 이름이다. 연우회는 1977년 첫 전시회를 개최한 이후 지금까지 38회 회원전을 열었다. 1980년부터는 매월 회보도 발행하기 시작했다. 일개 서예원으로 드문 일이다. 지난 2009년 회보 발간 300회를 맞아 300회 회보를 모두 담은 의미있는 책자 ‘연우회 발자취 34년’도 펴냈다. 천천히 읽어보니 살아있는 광주의 서예사(史)다.

그중에서 재미있었던 건 야유회와 함께 진행되던 ‘담요세탁’. 글씨를 쓸 때는 당구대에 깔려 있는 녹색 천을 바닥에 깔고 쓰는 데 오래 사용하면 먹이 먹어 쓸 수가 없었다. 연례행사로 산 깊은 곳으로 들어가 함께 빨래를 하곤 했다. 이 선생은 “담요 세탁을 핑계로 회원들 친목도 다지고, 음식도 나누곤 하던 즐거운 행사였다”며 웃었다.

이날 자리를 같이한 연우회장 유백준씨는 서력 40년으로 이 선생 밑에서 30년을 배웠다. 마산에서 처음 서예를 접한 그는 외판원이 팔던 서예도록에서 처음 학정 선생의 글씨를 접했고, 문하에 들었다. 이 선생이 지어준 호는 우계(愚溪), ‘어리석은 시냇물’이라는 뜻이다.

“선생님에게 호를 내려받는 건 큰 영광이죠. 제 호는 생긴 게 껀정하고, 글씨체도 학과 비슷하다는 의미로 송곡 선생님이 ‘학정’이라고 지어주셨어요. 또 학은 소나무와 함께 있으니 늘 선생님과 함께라는 의미도 있구요. ‘우계’에도 뜻이 담겨있죠. 어리석은 게 더 영리할 수 있어요. 또 시냇물을 항상 흘러서 맑죠. 물이 항상 밑으로 흐르듯 자신을 낮추는 삶을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습니다.”

1982년부터 학생들을 대상으로 열기 시작된 전국서예작품공모전은 학정서예원이 한국 서예계에 끼친 또 다른 공이다. 서예 인구가 줄어들면서 매년 한글날 즈음에 개최하는 공모전 참여자 수가 예전보다 감소하기는 했지만 일본 교포와 조선족들이 참여하면서 올해부터 세계청소년서예대전으로 확장된다. 공모전 출신들은 전국에서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학정서예원은 서예 교육의 ‘못자리’이자 서예인의 ‘등용문’이다. 지금까지 서예원을 거쳐간 이는 1만여명에 달하고 대한민국 미술대전 초대작가는 40명에 이른다.

이 선생의 하루는 새벽 3시30분에 시작된다. 한시간 정도 신문을 꼼꼼히 읽은 후 봉선동 집을 나서는 시간이 오전 5시10분. 걸어서 오전 6시면 서실에 도착해 일이 없으면 오후 6시까지 글씨를 쓰고 지도한다.

5·18 국립묘지 민주의 문 휘호 작업과 백양사 일주문과 서옹 큰스님 기적비 등을 쓴 그는 현재 도림사·송광사 일주문 작업을 진행중이다. 8년 전부터는 취미로 아크릴 물감을 손에 묻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취미로 모은 벼루는 400여개에 달한다.

“글씨를 쓰면 마음이 가라앉고 기뻐져요. 희열을 느끼는 거죠. 엔돌핀이 나온다고 할까요. 자연스레 단전호흡이 되고 흥이 일어납니다. 흥이 일어나지 않으면 글씨를 쓸 수가 없거든요. 화가 나 코를 씩씩 불다가도 먹을 갈고 글씨를 쓰다보면 차분해지곤 하죠.”

학정 선생이 서예를 배우러 오는 이들에게 처음 하는 말이 있다. “많이 참으라.” 진득하게 글씨 쓰기에 몰두하라는 이야기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 묵향 가득한 공간에서 무릎을 꿇고 한자 한자 글씨를 써내려가는 이들의 모습에선 진지함이 가득했다.



/김미은기자 mekim@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