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별들의 고향’ 이장호 감독을 인터뷰했다. 이 감독은 5월부터 광주에서 영화 인력을 키우고 영화도 제작한다. 이 감독을 광주로 불러들인 이는 독일 출신 선교사 서서평(엘리자베스 쉐핑·1880∼1934)이었다. 이 감독은 그녀가 묻혀 있는 양림동 선교사 묘역에 들렀을 때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서평과 관련된 수많은 일화들을 접한 이 감독은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찍기로 결심했다.

서서평은 1912년 조선에 들어온 후 세상을 떠난 1934년까지 광주 양림동에 머물렀다. 그녀는 고아들의 어머니였다. 한센인 아들을 양자로 들이고 13명의 아이들을 양녀로 입양했다. 또 행려병자, 한센인, 거지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놓았다. 제중원(현 광주기독교 병원)의 간호사로도 활동했으며 한국 최초의 여자 신학교인 광주 이일학교를 설립했다. 그녀의 장례식은 광주 최초의 사회장이었다. 그녀가 남긴 건 ‘덮고 있던 담요 반조각과 일주일 품값에 해당하는 돈 7전, 강냉이 가루 두 홉뿐’이었다고 전해진다.

봄날, 양림동을 찾아 그녀의 흔적을 서서히 따라가 본다. 양림동을 거점으로 다양한 문화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정헌기씨가 동행이 되어주었다.

시작은 기독간호대학에 자리한 오웬 기념각(광주시 유형문화재 기념물 제26호)이다. 광주에서 활동한 오웬 선교사 가족들의 기부로 1915년 세워졌으니 올해 딱 100살이 됐다. 회색 벽돌을 쌓아 지은 건물은 아름답다. 주위를 빙 둘러본다. 찾는 이들이 건물을 바라보며 쉬어갈 수 있도록 휴식 공간도 마련돼 있다. 멋스런 유리창, 단아한 아치형 입구. 무엇보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내부 공간이 인상적이다. 마루가 깔린 경사진 바닥, 2층에서 내려다 보는 모습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아련한 느낌을 준다.

서평은 이곳에서 부인 성경 공부반을 운영했다. 광주 각지에서 200명이 넘는 부인들이 모여들어 마루바닥에서 잠자며 그녀와 성경 공부를 했고 15∼40세 여성을 대상으로 초등학교 과정도 진행했다. 오웬기념각에서는 2년 전부터 문화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변사극이 시민들을 만났고 오는 5월에도 문화 단체‘순수’가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와 클래식 연주가 어우러진 콘서트를 준비중이다.

광주기독교병원쪽으로 걷다 보면 오른쪽에 광주 이일학교터가 있다. 서평은 남편과 사별한 여인 등 공부할 기회를 놓친 여성들을 데려다 자신의 집 안방에서 전도부인 양성학교를 운영했다. 이후 1926년 ‘사립 광주이일학교’를 열었다. 아쉽게도 이곳에 이일학교 흔적은 없다. 대신 백두빌과 한라빌이라는 다세대 주택이 들어서 있다.

골목 맞은 편 광주기독교병원은 서평이 광주에 들어와 처음 일했던 곳이다. 서평은 제중원에서 간호원들을 감독하는 일을 했고, 제중원 2대 원장이었던 우월순이 적극적으로 진행했던 나환자 치료에도 동참했다. 병원 뒷편 작은 기념 공원의 높은 굴뚝이 병원의 100년 역사를 말해준다.

수백살이 넘은 호랑가시나무(광주시 지정 기념물 15호)가 서 있는 길을 지나면 만나는 곳은 우월순 사택(광주시 지정 기념물 제15호)이다. 광주에 남아 있는 서양식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1909년에 지어졌다. 서평과 우월순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이 곳 역시 서평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공간이다. 지금은 영성센터 등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건물 옆 잔디밭에서는 음악회 등이 열리곤 한다.

사택 곁을 지나 양림산을 오른다. 선교사 묘역으로 가는 길이다. 시핑길, 윌슨길 등 선교사들의 이름을 딴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김현승·김영랑 등의 아름다운 시 구절을 만날 수 있는 문학소공원이 눈에 띈다.

연둣빛 나무들이 눈을 시원하게 해주는 길을 따라 조금 더 오르니 선교사 묘원이다. 1909년 세상을 떠난 오웬 목사를 비롯해 선교사와 선교사 가족들이 묻힌 공간엔 모두 23기가 자리하고 있다. 소박한 돌무더기 아래 놓인 작은 묘비들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묘역엔 흰철쭉꽃이 한창이다. 동백나무의 붉은 꽃도 매달려 있다. 서평의 묘는 더 없이 소박했다. 작은 자갈이 깔린 무덤이 보인다. 누군가 비석 위에 올려놓은 붉은 동백꽃 한송이가 눈에 띈다. 장미꽃 두 송이도 놓여 있다. 가을이면 붉게 물드는 은단풍 나무도 보인다. 묘비는 뒤로 돌아 앉아 있다. 생몰연대와 이름만 적힌 소박한 묘비다.

그녀는 자기를 치료하던 브랜드 선교사에게 “나를 치료하고 돌보는 일로 해서 조선인 환자들을 결코 등한히 하지 말아달라” 부탁하고 자신이 늘 챙기던 35명의 가난한 과부들을 돌봐달라고 했다 한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의 삶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은 십시일반 장례식 경비를 조달하고 묘비석을 세우기 위해 모금을 했다. 선교사 M.B 녹스는 한 글에서 “그녀의 장례식은 마치 개선행진과 같았다”고 적었다.

묘원 옆, 소박한 비석들과 다소 어울리지 않는 기념 조형물을 지나, 선교사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새긴 돌계단을 밟으며 양림산을 내려온다.

13명의 양녀를 키웠던 서평의 집이 정확히 어디쯤이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한다. 정현기씨는 옛 사진과 증언들을 볼 때 우월순 사택과 현재 호랑나무 레시던시로 활용중인 선교사 사택 중간 즈음이지 않을까 짐작했다.

1934년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동아일보는 이렇게 적었다. ‘자선 교육 사업에 일생 받힌 빈민의 자모(慈母) 서서평 서거…보리밥, 된장국과 고무신 끌고 생활.’

‘광주근대문화의 보물창고’ 양림동은 자기만의 테마를 갖고 걷기 좋은 곳이다. 양림동을 걸을 때 한번쯤은 서서평을 마음에 품고 걸어보는 건 어떨까. 옥양목 저고리에 검은 통치마를 입고, 맞는 신발이 없어 남자용 검정 고무신을 신었던 서서평이 조선의 어려운 이들을 마음에 품고 늘상 걸었을 바로 그 길을.

/김미은기자 mekim@kwangju.co.kr

/사진=김진수기자 jeans@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