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끝자락, ‘다산’(茶山)을 찾아가는 길이 왠지 설렌다. 남도답사 일번지 강진. 옅은 안개가 낀 바다와 갯벌, 나지막이 내려앉은 산과 길이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처럼 정겹다.

강진군은 강진만 임천배수장∼백련사∼다산초당∼다산유물전시관으로 이어지는 4.9km의 길을 강진의 명품길로 가꾸고 있다. 2009년에는 행안부가 주관하는 ‘찾아가고 싶은 명품녹색길 33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강진군 강진읍 덕남리 ‘철새 관찰지점’으로 유명한 임천배수장을 출발해 강진만을 옆에 끼고 1.8km를 걷다 보면 백련사 입구. 다시 이곳에서 가파른 길로 1.5km 올라가면 백련사가 나온다.

고려시대 귀족불교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던 백련결사 운동의 본거지이기도한 백련사는 만덕산(408m) 중턱에 크지도 작지도 않게 자리한 정겨운 사찰이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이 절을 가리켜 “남쪽 바다에 임해 있고 골짜기 가득히 송백이 울창하며 동백 또한 곁들여서 창취가 사계절을 통해 한결같은 절경”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요즘도 마찬가지다.

백련사가 기댄 만덕산은 예로부터 야생 차나무가 많아 ‘다산’(茶山)으로 불렸는데 이곳에서 18년간 귀향살이를 한 정약용(1762∼1836년)은 이를 자신의 호로 삼았던 것이다.

백련사 주변에는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된 동백나무 숲이 있다. 동백나무 7000여 그루가 자라는 울창한 군락지로 겨울에서 초봄까지 동백꽃이 붉게 핀다.

백련사 차밭을 왼편으로 끼고 들어서면 다산초당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유배시절 다산의 벗이 돼주던 나무와 풀, 땅과 하늘이 어우러진 800m의 호젓한 오솔길이다. 이 길은 또한 유배지인 이곳에서 말벗을 삼았던 혜장선사(1772∼1811년)를 만나러 왕래하던 길이다. 혜장은 차에 조예가 깊었고 불경은 물론 유교 경전도 통달했던 인물. 혜장이 해남 대흥사의 말사인 백련사에 머물 때 다산은 그에게서 배운 다도에 심취했다.

다산은 아마도 차의 향기에 젖어, 혹은 곡차에 취해 이 길을 오가며 자신의 생각을 가다듬었을 것이다. 불가의 학승이었던 혜장이 과도한 음주로 일찍 세상을 뜬 사실로 미뤄볼 때, 다산과 혜장은 차와 함께 술도 꽤나 즐겼을 것이라는 게 후세 사람들의 추측이다.

다산초당까지 동행한 백련사 원정스님은 “이곳 길도 좋지만 정황상 혜장선사와 다산이 걸었던 길은 백련사 왼편으로 더 들어가 무문관 옆으로 난 깃대봉 가는 길과 닿는 길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스님도 수행 중 마음이 산만할 때면 그 길을 걷곤 하는데 그윽한 나무향이며 새소리, 시누대 터널이 있는 700여m의 길로 사색하며 걷기 좋은 길이라고 귀띔한다.

숲 사이로 난 길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가파르지 않아 편안하게 걸을 수 있고, 중간 중간 시원하게 펼쳐진 강진만도 내려다볼 수 있다. 소나무는 물론 편백이며 비자나무도 빼곡해 삼림욕 코스로도 제격이다.

다시 20여 분 내리막길을 걷다 보면 다산초당. 다산은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인 1801년 신유박해에 뒤이은 ‘황사영백서사건’에 연루돼 강진으로 유배됐다. 사의재, 고성사 보은산방 등을 거쳐 1808년부터 이곳 초당에 10년 정도 머무른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은 본래 귤동마을(유자나무가 많아서 부쳐진 이름)에 터를 잡고 살던 다산의 외가쪽 해남 윤씨집안의 산정으로 유배 생활이 몇 해 지나면서 삼엄했던 관의 눈길이 어느 정도 누그러지자 윤씨가에서 다산을 이곳으로 모셨던 것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해남윤씨 집안의 각별한 배려로 1818년 9월 해배될 때까지 본격적으로 학문에 탐구하게 된다.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이른바 ‘다산학’(茶山學)으로 일컬어지는 방대한 저술(600여권)활동 대부분은 이곳에서 이뤄졌다.

교실로 사용하며 손님을 맞았던 본채(다산초당)와 다산이 기거하며 집필에 주력했던 동암(東庵), 또 제자들의 거처로 사용했던 서암(西庵, 茶星閣)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건물들은 근래에 복원·신축한 것이지만 2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다산은 이곳에서 또 다른 세상을 꿈꿨을까. 그는 물을 끌어다 인공의 폭포를 만들었고 연못도 팠다. 잉어를 길렀고, 화초를 심었다. 산 중턱엔 밭을 일궈 채소도 길렀다.

초당 주변에 남아있는 솔방울을 태워 차를 끓였다는 넓적한 바위와 직접 만들었다는 샘 약천(藥泉), 유배생활을 마무리하며 바위에 새긴 ‘丁石’(정석)이라는 글자 그리고 바닷가의 돌을 쌓아 만든 연못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동암 뒤편 흑산도로 유배 갔던 형 약전을 그리며 심회를 달랬다는 곳(지금은 천일각이 들어서 있다) 등은 당시 다산의 산중생활을 짐작케 한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것을 / (…) / 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가서 / 다시 잎으로 되돌아오는 동안 / 다산이 초당에 홀로 앉아 / 모든 길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정호승 ‘뿌리의 길’ 중〉

다산을 느끼며 슬렁슬렁 내려가는 길. 울퉁불퉁한 나무뿌리가 고스란히 드러나 원시적인 야성미를 느끼게 하는 길을 만날 수 있다. 대나무밭에서나 보던 땅 위로 솟은 뿌리들을 볼 수 있는 길이다. 나무의 힘줄이 툭툭 불거져 꿈틀꿈틀 살아 움직일 것 같은 기묘한 모습이다. 정호승 시인은 이 길을 ‘뿌리의 길’이라고 불렀다.

다시 길을 재촉한다. 약 300m 정도 내려오면 식당 다산명가를 지나 삼거리.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귤동마을이고 오른쪽은 다산유물전시관이다. 귤동마을 고갯길 넘어 전시관에 이르는 두충나무길도 장관이다.

2시간여의 산보로 조금 힘들더라도 다산의 업적과 유물 등을 알기 쉽게 설명해 놓은 전시관에 들르는 건 잊지 말자.

옛 정취가 그대로 묻어나는 다산초당은 당시 다산의 산중생활을 짐작케한다.

/김대성기자 bigkim@kwangju.co.kr

/사진=최현배기자 choi@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