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어디로 가나. 새해가 되어서도 변화가 없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되풀이되는 일상에 몸과 마음이 다시 지쳐간다. 무거운 짐 내려놓고 호젓한 숲길을 따라 걷고만 싶다. 어디가 좋을까?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태안사 숲길은 사색하며 걷기엔 일품이다. 곡성군은 보성강 주변 오곡면 압록리∼죽곡 하안∼태안사에 이르는 12.5㎞를 ‘곡성의 아름다운 길’로 지정했다.

태안사는 섬진강과 보성강이 몸을 섞는 압록에서 석곡·순천 방향으로 행정구역상 죽곡면에 있다. 압록에서 보성강을 따라 이어지는 18번 국도를 타고 5㎞ 정도를 가다 보면 태안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태안교를 건너면 옛 나루터와 주막(뱃석거리)이 있었던 곳. 그때의 모습은 찾아볼 길 없지만 위용은 여전하다.

다리를 건너 2차선 도로가 원달재를 넘어 순천으로 가는 840번 지방도로다. 이곳은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는 봉두산(해발 753.7m)이 북서쪽으로 흘러드는 산 아랫마을들로 예부터 터가 좋아 인물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고려의 개국 공신인 신숭겸(?∼927년)을 비롯해, 가깝게는 대한민국 제2대 민의원을 지낸 조순씨와 심상철(전 한국과학기술원 원장)씨가 이곳 출신이다. 주민 이해영(44)씨의 말을 빌리면 “보성강이 남에서 북으로 올라가는 역류라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저항적 인사도 많이 나왔다”고 한다.

산과 산 사이의 좁은 도로 길을 따라 3㎞ 쯤 가다 보면 폐교(동계초)된 학교를 활용해 만든 ‘섬진강 문화학교’가 나온다. 이곳엔 독도 사진으로 유명한 사진작가 김종권이 운영하는 ‘김종권 남도사진 전시관’이 있어 남도의 비경을 담은 사진을 감상하며 쉬어가기 좋다.

남도사진 전시관에서 굽이굽이 마을길을 돌아 1.8㎞ 가면 태안사 입구. 태안사 숲길은 여기서 시작된다. 태안사까지 아름다운 숲길이 2㎞ 남짓 이어진다.

신숭겸 장군 영적 비각을 시작으로 태안사 입구를 거쳐 400m를 걷다 보면 만날 수 있는 것이 조태일 시문학 기념관. 이곳 출신인 조태일(1941∼1999년) 시인의 생애와 문학적 성과를 둘러볼 수 있는 곳이다.

조태일 시인이 누구인가. 힘찬 언어로 폭압적 현실에 저항했던 민족시인 조태일은 이곳 태안사에서 태어나 자랐다. 생전 시인은 “나의 시는 태안사에서 비롯되었고 태안사에서 끝이 난다”고 했을 정도로 이곳은 그에게 각별했던 곳이다.

지금은 장정 서너 명이 나란히 걸을 정도로 넓은 길이 됐지만, 어렸을 적 소 구루마(소가 끄는 수레) 하나 겨우 지나갈 수 있었을 이 길에서 친구들과 떼지어 몰려다니며 온종일 토끼나 노루, 멧돼지 등을 사냥하고 뛰어 놀았을 그를 그려본다.

숲은 참나무, 소나무, 고로쇠나무, 오동나무, 산죽들로 가득하다. 봉두산(동리산·오동나무가 지천이라 붙여진 이름)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을 따라 좌우로 조성된 숲길은 경사가 거의 없어 편하게 걸을 수 있다. 좌우로 눈은 쌓여있고 가금씩 불어오는 바람소리에서도 호젓함이 묻어난다.

1시간 여를 걸어야하는 숲길에는 계곡을 가로지르는 여러 개의 다리도 있다. 하나하나 건너며 몸을 단정케 한다. 속세의 미련을 버리지 못했으면 다시 돌아가라는 귀래교(歸來橋)에서부터 마음을 씻으라는 정심교(淨心橋), 도량이 가까웠음을 알리는 반야교(般若橋)와 해탈교(解脫橋). 그리고 이 다리들을 건너면 태안사의 절정이자 극치인 능파각(凌波閣)이 나타난다.

능파각은 계곡 위에 정자를 세워 놓아 아름답다. 절로 들어가는 금강문으로 누각을 겸하는 다리건물이다. 계곡과 물굽이가 어우러져 능파각이라 불렀다.

하지만 태안사에서 제일로 꼽는 길은 능파각에서 일주문에 이르는 길. 굵직한 돌들이 박힌 좁은 길도 나타나고, 풋풋한 흙길도 만난다. 자연과 가장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숲길이지만 그리 길지 않아 아쉽다.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얽히고설킨 세상사의 고달픔이 절로 풀어지는 것 같다.

겨울철 찾은 태안사는 적막했다. 태안사는 신라 경덕왕 때 적인선사 혜철이 창건한 사찰로 신라 말 중국 유학파 스님이 전파한 선종, 참선 중심의 수행도량. 전국 9곳의 선방 사찰 가운데 하나로 ‘구산선문’(九山禪門)으로 불린다. 이런 연유로 태안사는 1200년 동안 선방 수좌의 수행터가 됐다. 조선 초에는 효령대군이 머무르면서 왕가의 온당으로 삼기도 했다.

이 사찰에도 한국전쟁의 상흔이 곳곳에 있다. 전쟁통에 많은 건물이 불탔고, 경내에는 아직도 총탄의 흔적이 선명히 남아있다. 절 옆에 자리한 경찰충혼탑을 보며 그때 그 전쟁의 참혹상을 떠올려 본다. 피안의 이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원혼이 되었을까.

태안사에는 귀한 문화재도 많다. 일주문 계단 아래 우측에 고승들의 숨결이 깃든 부도군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 있는 광자대사 윤다의 부도비(제275호)와 광자대사탑(제274호)이 보물로 지정돼 있다. 혜철스님의 제자인 광자대사는 고려 때 왕사를 지내며 태안사를 큰 절로 만든 스님이다.

대웅전 건물 뒤에 있는 혜철스님의 부도(제273호)도 보물로 지정돼 있다. 탑의 모양이 섬세하고 정교해 예술적 가치도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태안사 뒷길로 10여 분 오르면 신숭겸 장군의 목 무덤도 있다.

절 앞에 방화용으로 조성한 연못도 특이하다. 연못을 가로지르는 나무다리, 작은 섬 위에 우뚝 솟은 석탑은 여느 절에서나 만나기 어려운 풍경이다. 일주문을 나서 좌측으로 이동하면 극락전과 비구니가 기거하는 성기암을 향하며, 이곳에서부터 봉두산 정상까지 등산로가 이어진다.

이제 피안의 세계에서 하산할 시간. 산사의 어둠은 빠르기 마련, 해가 보일 때 나서야 한다. 피안의 세계는 높은 곳에 있고 속세는 낮은 곳이다. 위에서 아래로, 속세로 향하는 발걸음은 경쾌하다.

무엇을 깨달았는지, 무엇을 구하고 왔는지 말할 필요도 없다. 아무 말 없이 걸어도 웃음이 절로난다.

조태일 시문학기념관 전경

/김대성기자 bigkim@kwangju.co.kr

/사진=최현배기자 choi@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