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순천 출신의 작가 김승옥은 소설 ‘무진기행’에서 가늠할 수 없는 사람들의 절망을 이야기 했다. 차디찬 새벽 바람을 몰아내고 떠오르는 아침해에 안개가 생명력을 얻는 11월, 사람들은 순천만의 가을을 떠올린다.

입동이 지났으니 절기상으로는 겨울이다. 하지만 한 낮 낙엽을 간지르는 햇살과 바람은 여전히 가을이다. 안개 자욱해진 순천만에도 가을과 겨울이 숨바꼭질 하고 있다.

순천만은 지난 2003년 12월 해양수산부로부터 습지보전지역으로 지정됐다. 2006년 1월에는 람사르 협약에 등록된 소중한 생태계다. 국내 최대 갈대 군락지를 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순천시 교량동과 대대동,해룡면의 중흥리, 해창리 선학리 등에 걸쳐 펼쳐진 갈대밭의 면적은 약 30만평에 달한다. 순천 시내를 가로지르는 동천과 순천시 상사면에서 흘러 온 이사천의 합수 지점부터 하구에 이르는 3㎞쯤의 물길 양쪽에는 온통 갈대가 지키고 서있다.

갈대를 찾아가는 길, 순천만자연생태관에서 미리 순천만의 자연을 만난다. (관람료 성인 2천원) 생태관과 이어져 있는 천문대에서 하늘을 올려다 볼 수도 있다. 관찰 망원경을 통해 산책 나갈 순천만을 한 번 휘휘 돌아본다.

반가운 손님들이 망원경에 포착된다. 지난달 말 겨울나기를 위해 순천만을 찾은 겨울의 진객 흑두루미(천연기념물 제228호)가 우아한 자태로 걸음을 옮기고 있다. 순천만에는 머리갈매기, 황새, 저어새등 국제적 희귀조류 및 200여 종의 한국조류가 공생한다.

갈대숲 탐방로로 발길을 옮긴다. 사람 키보다 웃자란 갈대는 북슬북슬한 머리를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어댄다. 목재데크를 따라 발길을 옮기는 곳엔 온통 통통하게 살이 오른 갈대뿐이다.

순천만 물길을 타고 올라온 안개에 휩싸여 회색으로 물들었을 갈대밭은 오후 햇살에 온통 황금빛이 된다. 갈대밭 사이로 속살을 드러낸 고운 갯벌에는 생동하는 생명이 그려내는 추상화가 펼쳐져있다. 뻘을 먹고 사는 짱뚱어와 방게가 살금살금 갯벌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의 움직임은 갯벌위에 선명하게 남아 한 폭의 추상화가 된다. 갯벌은 살아있다.

순천만의 S자형 수로는 전국의 사진작가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우리나라 사진작가들이 선정한 10대 낙조 중 하나. S자로 굽이치는 수로 위로 저녁노을이 붉게 부서지는 풍경은 천상의 풍경이다. 자연이 만들어낸 매혹적인 풍경을 담기 위해 많은 사진작가들이 순천만을 찾고 있다.

순천만의 황홀한 일몰을 오롯이 만나기 위해서는 용산 전망대를 찾아야 한다. 용산은 순천시 해룡면 농주리에 있는 아담한 야산. 용이 엎드린 모습 같다고 하여 용산이라 이름 붙었다.

갈대데크를 지나 산책로 계단을 따라 용산 전망대를 찾아갈 수 있다. 산책로에서 1㎞ 거리지만 만만한 길은 아니다. 가파른 경사와 30분 가량 씨름을 한 뒤에야 용산 전망대에 다다를 수 있다. 순천만의 자연을 체험하기로 마음먹었다면 편한 복장은 필수다.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야 올라설 수 있는 전망대에는 순천만의 풍광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동그란 갈대군락 수십 개가 섬이 되어 순천만 갯벌을 장식한다. 낙조를 담아가기 위해 자리를 잡은 사진가들의 모습도 이색적이다.

저물어 가는 해의 마중을 받으며 내려오는 발길은 시름을 벗어두고 온 듯이 가볍기만 하다. 황금빛으로 물들었던 갈대밭은 석양에 붉게 치장을 했다. 바람도 제법 싸늘하다. 순식간에 계절이 바뀐다. 해가 저물어간 반대쪽 산에는 이내 달이 봉긋 솟아 올라 작별인사를 청한다.

갈대사이 둑길을 따라 갈대 열차를 타고 만끽할 수 있는 여유도 있다. 갈대 열차의 운행시간은 왕복 20∼25분, 이용요금은 1천원. 해설사의 설명과 함께 순천만의 얘기를 들을 수 있다. 월요일 휴무.

무진교 아래 선착장에서 출발하는 생태체험선도 준비됐다. 순천만 S자 갯골을 둘러본 다음 돌아오는 체험선은 왕복 약 6㎞의 물길을 오가며 40분쯤 걸린다. 해설사의 친절한 설명까지 준비되어 있으나 자연의 허락을 받은 뒤에야 체험선에 오를 수 있다. 물때에 맞춰 운항시간이 달라지기 때문에 미리 확인해야 한다. 어른 4천원, 청소년 2천원. 일요일 휴무. 문의 순천만자연생태관 (061)749-4007∼9

해마다 월동지를 찾아 늦가을 순천만을 찾아오는 천연기념물 제228호 흑두루미가 올해도 어김없이 순천만을 찾았다. 지난달 29일 이곳에 첫 발길을 한 겨울의 진객 흑두루미가 순천만에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김여울기자 wool@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