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비엔날레에 전시된 작품은 만지면 안 되는데 이 작품은 마음껏 밟고 만져도 됩니다. 관람객들이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표현하고, 다른 관람객들이 그걸 감상하는 게 이 작품의 컨셉트입니다. 여러분의 흔적을 남겨 보세요.”
지난 19일 오후, 2008 광주비엔날레(9월5일∼11월9일)가 열리고 있는 광주시립미술관 전시관. 필리핀 출신으로 금형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론다(여·32)씨가 어설픈 동작과 서툰 한국말로 작품 설명을 하고 있었다.
광주에서 9년째 생활하고 있는 론다씨가 광주비엔날레를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 고향 작가의 작품을 관람객들에게 직접 설명해주는 ‘광주비엔날레 외국인 노동자 일일 도슨트 체험’을 위해 공장이 아닌 광주비엔날레로 출근한 것이다.
론다씨는 모국에서 온 작가 레이문도 알바노의 ‘모래 위의 발자국(Step on rhe sand and Make Footprints)’이라는 작품을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그럼에도 관람객들이 그녀의 설명을 잘 알아듣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는 모래 상자 위에 직접 올라서서 발자국을 찍으며 관람객들을 향해 올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구경하던 관람객들도 그녀를 따라 하나 둘씩 모래 상자 안으로 들어가 발자국을 남기기 시작했다.
이번 행사는 문화생활을 하기 힘든 외국인 노동자들이 전시도 관람하고 모국 작가의 작품을 직접 설명하며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보라는 취지로 광주 비엔날레 재단이 마련한 것이다.
필리핀에서 여행가이드로 활동했었던 론다씨는 “한국에서 오래 생활했지만 주말에 미술관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면서 “도슨트를 잘하고 싶었는데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려고 하니 마음만 앞서고 긴장이 돼 설명을 잘 못했던 것 같다”고 말하며 쑥스러워 했다.
이날 비엔날레 일일 도슨트 체험에는 중국인 장궈(28), 홍대위(34)씨도 함께했다.
장궈와 홍대위씨가 도전한 작품은 중국출신 작가로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빙위의 ‘강산만리’. 이 작품은 언뜻 보면 전통 중국 미술인 수묵화 같아보이지만 회화재료인 콩테(conte·연필 모양의 크레용)로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표현한 것이다.
작품 속에 담긴 철학적인 메시지까지 설명해야 해 장궈와 홍대위씨는 관람객들 앞에 서기 전 사전 연습까지 하며 철저하게 준비했다.
이들로부터 작품 설명을 들은 김경현(고2·광주시 서구 광천동)양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고향 작가의 작품을 설명해 생동감 있게 느껴졌던 것 같다”면서 “조금만 더 연습하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론다씨를 비롯해 4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은 도슨트 체험을 위해 이날 오전부터 비엔날레 재단을 찾아 조인호 전시부장으로부터 현대미술에 대한 기초상식과 작품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들으며 미술 지식을 쌓았다.
장궈씨는 “미술작품 하나에 이렇게 많은 것들이 담겨있는지 몰랐다”며 “단순히 작품 설명만 하는 게 아니라 작가, 역사, 문화까지 종합적으로 이해해야하는 게 어렵다”고 말했다.
주말을 맞아 아이들과 함께 전시장을 찾은 주부 이은숙(39·광주시 광산구 송정동)씨는 “한국말이 서툴러도 열심히 설명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오히려 더 보기 좋았던 것 같다”면서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해볼 수 있는 일은 많이 없는데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들을 교육한 조인호 전시부장은 “전 세계 미술인의 축제인 광주비엔날레에 광주 지역 외국인 노동자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기 위해 마련했다”면서 “외국인들이 광주에 머무는 동안 다양한 문화 체험을 해볼 수 있도록 사회적인 여건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은미기자 emlee@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