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친구들이 한 곳에 모일 수 있는 가게를 열게 돼 기쁩니다. 타향 생활에 지친 필리핀 노동자들의 ‘사랑방’으로 가꿔나가고 싶습니다.”
지난달 30일 광주시 광산구의 한 필리핀 상점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주말을 맞아 한 자리에 모인 필리핀인들이 연신 ‘얘기꽃’을 피운 것이다.
이들은 하남산단 등 인근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로, 모처럼 필리핀 전통 음식을 나눠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60㎡ 남짓한 이 가게에는 필리핀 과자와 생선, 통조림, 맥주 등이 빼곡히 쌓여있었다.
또 가게 한켠에 마련된 주방에서는 이 곳에서 구입한 식재료로 음식을 만드는 모습이 보였다. 오랜 이국생활에 지친 필리핀 노동자들의 입장에선 싼값에 고향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사랑방’인 셈이다.
최근 이 가게를 연 주인공은 라이언(29)씨. 그는 지난 2003년 한국 입국 이후 갖은 고생 끝에 ‘가족’과 ‘개업’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지난해 부인 세라(30)씨와의 사이에 건강한 딸이 태어난 데 이어 지난 6월에는 건물주의 도움으로 가게까지 열게 된 것이다.
그는 “한국은 아내와 딸을 만나게 해준 ‘제2의 고향’”이라며 “모쪼록 필리핀 상점이 이국생활에서 고생하는 고향 친구들에게 힘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라이언씨의 한국생활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한국 입국 이후 6년간 심각한 생활고와 잦은 부상에 시달려 온 것이다.
그는 6년 전 하남산단 내 금속공장에 첫 취업한 이후 혹독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공장숙소에서 숙식을 해결하고도 고향 집에 돈을 부치고 나면 항상 생활비가 부족했다.
그는 “하루 평균 10시간 정도 용접일을 하고도 50만원도 안되는 돈을 받았다”며 “산업연수생 신분인 탓에 직장도 옮기지 못한채 3년을 근무해야 했다”고 회상했다.
크고 작은 부상도 라이언씨의 한국생활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됐다. 용접 때 튀는 불꽃으로 인해 몸 곳곳이 화상을 입는 것은 물론이고 작업중 대형 물통이 떨어지는 바람에 두 번이나 발가락 수술을 받기도 했다.
그는 한국생활이 힘들어질수록 더욱 이를 악물었다. 4남1녀중 장남인 탓에 동생들의 학비와 가족들의 생활비를 보태야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발가락 수술을 받은 다음날에도 공장을 찾을 만큼 억척스럽게 일에 매달렸다.
이같은 적극적인 성격은 한국에서 필리핀 부인을 만난 직접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 2006년 부인 세라씨와의 첫 만남 이후 결혼까지 채 1년도 걸리지 않았다.
결혼 이후 그의 한국생활은 한결 수월해졌다. 먼 이국땅에서 의지할 곳이 생겼기 때문이다. 또 세라씨는 결혼 당시 인근 초등학교에서 6년째 영어강사로 일해온터라 한국의 ‘물정’을 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부인의 권유로 금형공장에서 목재소로 직장을 옮긴 이후 생활도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기존 직장보다 급여가 두 배 이상 늘어나 보다 안정적으로 고향집에 송금을 할 수 있었다.
필리핀 상점 개업 역시 부인의 아이디어였다. 세라씨는 두살바기 딸 카일라가 태어난 이후 생활비와 양육비 부담에 시달렸다. 또 항상 재해 위험에 놓여있는 남편을 위해서라도 안정적인 일을 마련해주고 싶었다.
세라씨는 “가게를 할 돈이 없어 막막했었는 데 마음씨 좋은 주인 아저씨가 1년간 무상으로 빌려줬다”며 “주위분들의 도움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딸을 잘 키우고 싶다”고 말했다.
세라씨는 또 “가게를 낸 이후 필리핀 친구들이 모두 모여 한국생활을 얘기하고 생일파티도 하는 게 가장 보람 있다”며 “이 가게를 이국생활의 외로움과 고단한 삶을 달래주는 ‘쉼터’로 만들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최경호기자 choice@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