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한풀 꺾이고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한 바람이 한여름에 지친 심신을 추스르게 한다.
저녁에는 풀벌레 소리가 벌써 정답다. 한 계절을 정리할 때는 여행만 한 것이 없다.
누구나 무작정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우울할 때, 출근하기 싫을 때, 연인과 헤어졌을 때, 나를 찾고 싶을 때…….
공통점을 전혀 찾을 수 없는 수많은 이유와 상황들이 이유없이 ‘떠나고 싶은 욕구’로 나타나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그만큼 ‘떠남’에는 모든 것을 치유해 주는 능력마저 엿보인다.
그렇지만 치유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떠났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일탈의 감흥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기 때문이다. 이 여름의 끝자락에서 훌쩍 떠나는 여행을 하며 무더위에 지친 심신을 추스려 보자.
해남의 땅끝마을이 육지의 최남단이라면 달마산의 미황사(美黃寺)는 육지의 가장 남쪽 끝에 있는 절이다.
두륜산의 자락은 땅끝으로 이어지다 달마산에서 수직 바위를 일렬로 정렬시켜놓았다. 해발 489m로 높지 않으나 해수면에서부터 솟아 오른 덕에 산세가 녹록치 않다. 칼처럼, 창처럼 솟구친 바위의 능선은 달마산 정상인 불선봉을 지나 도솔봉까지 약 8㎞에 거쳐 이어진 다음 땅끝에 솟은 사자봉에서 갈무리 된다. 남도의 금강산으로 불리는 달마산을 병풍삼아 서편 자락 볕 좋은 곳에 미황사가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 육지 최고 끄트머리에 있는 절인 탓일까? 입장료도 주차요금도 없다. 누각 밑을 지나면서 조금씩 드러나는 넓은 절 마당. 그 마당으로 오르기 시작하면 소박하지만 기품있는 대웅전과 함께 그 뒤에 그림처럼 펼쳐진 달마산의 기암괴석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가 바로 극락인가 싶다.
달마산은 남쪽의 금강산이라 할 만큼 화려하고 아름답다.
이 산이 둘러싼 대웅전은 이곳으로 들어오는 모든 이들을 두 팔로 안아줄 듯 포근하게 맞아준다. 긴세월 동안 단청의 빛이 바래 화장기 하나 없는 맨얼굴이다. 보물 947호로 지정된 대웅보전 천장에는 범어로 쓰여진 글자와 일천불의 벽화가 있는데 국내에서 보기드문 수작이다.
천장 곳곳에 그려진 천불의 부처님 때문에 미황사 대웅전에서 세 번만 절을 올리면 한 가지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부처님이 천 분이 계시니 세번 절하면 삼천배 가 되니 소원이 이루어 지지 않겠는가?
독경소리 울리는 대웅전 너머로는 달마산 암봉이 마치 호위 군사마냥 열병해 사찰을 지키고 있다. 대웅전을 가운데 두고 좌우의 요차새와 뒤쪽의 응진당은 뒤에 든든하게 버티고 있는 달마산의 산세와 잘 어우러져 선경을 빚어낸다.
청명한 날이면 대웅전 앞에서도 저 멀리 서해바다와 다도해가 시야에 잡힐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을 눈으로 확인 할 수 있다. 경내를 천천히 걷다보면 머리가 한결 맑아지는 것 같다. 불교에서 말하는 행선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