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마리아나제도 속살 비치는 쪽빛 바다 神도 반했다
2008년 08월 15일(금) 14:59 가가
원주민 차모로어 ‘하파데이’로 인사하고, 스페인어 ‘아디오스’로 떠나보내는 얄궂고도 친절한 사람들. 200여년 간 이어진 스페인의 식민통치도 모자라 독일과 일본을 거쳐, 지금은 미국 자치령이 되어있는 산호섬들. 하루에도 몇 번씩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는 열대우 ‘스콜’이 궂은 역사마저 멀리 씻어내려 간 탓일까. 바람 잘 날 없었던 역사에도 사이판의 하늘은 푸르고 바다는 맑았다.
북마리아나제도는 한국에서 3천200㎞ 남짓 떨어진 서태평양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다. 1986년 인근에 있는 괌 섬을 제외한 14개 섬이 모여 미 연방 내 자치정부를 수립했다. 이 북마리아나제도의 주도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이판이다. 크기는 남북으로 약 21㎞, 동서로는 8.8㎞. 거제도의 3분의 1 정도 크기라고 생각하면 쉽다. 인천에서 4시간 남짓 날아가야 한다.
사이판 공항에 내리니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열대 특유의 들쩍지근한 향신료 냄새가 공기에 묻어난다. 게이트마다 떡하니 버티고 있는 차모로인들의 구릿빛 피부와 여기저기 늘어선 현란한 보색의 일본어와 한국어 간판이 미국령이라는 사실을 무색케 한다.
스페인 식민통치의 영향으로 이곳 원주민들 다수는 가톨릭계다. 거리마다 승용차보다는 대가족을 짐칸에 태운 픽업 트럭이 넘쳐난다. 드문드문 트럭의 행렬을 따라 달리다보니 일행을 태운 밴은 어느덧 시속 100㎞. 야자수와 불꽃 나무가 늘어선 차창 밖 열대의 단조로운 풍경은 60㎞를 달릴 때와 체감 상 큰 차이가 없다.
모래 대신 열 흡수가 탁월한 산호가루로 공사한 덕에 시내 곳곳은 높은 기온에도 아지랑이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불쾌지수가 낮다. 배수로 하나 없지만 맹렬한 스콜이 채 지나가기도 전에 빗물이 말라버리는 도로 역시 산호가루의 덕택이란다.
사이판에서의 일정은 섬 서쪽 해안 ‘마이크로 비치’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사이판의 시내라 할 법한 ‘가라판’이 인접해 있고 많은 호텔과 리조트가 이 비치를 끼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일본계 업체지만 한국어 가이드가 충실한 덕에 의사소통 문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쨍하고 부서질 것만 같은 바다를 등 뒤로 마이크로 비치를 즐기고 있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카메라에 담는 족족 작품이다.
‘마나가하 섬’은 마이크로 비치에서 20여분 거리에 있다. 수심 20여m까지 투명하게 비치는 코발트 빛 바다 위로 에메랄드 하나 박아놓은 듯 솟아오른 앙증맞은 섬. 과연 사이판의 진주라 불릴 만하다. 해변에서 출발하는 왕복 셔틀도 있지만 섬까지 가는 패러세일링도 추천할 만하다. 모터보트에 매달려 낙하산과 함께 상공으로 치솟으면 지상에서 미처 보지 못했던 마나가하의 진면목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다. 산호 사이로 물고기들이 지천으로 널린 탓에 허리 정도 잠기는 물가로만 가도 형형색색 열대어들과 헤엄치는 스노클링이 가능하다.
그러나 사이판의 매력을 한꺼풀 열어젖히면 곳곳이 전쟁의 흔적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 미 본토를 직접 타격할 전진기지로서 북마리아나제도의 전략적 가치가 컸던 만큼 이를 둘러싼 전투도 치열했다. 여기저기 물 밑엔 가라앉은 전투기 잔해들이 열대어들의 놀이터가 되어 있는가 하면 수풀 사이로 낡은 대포들이 녹슨 채 잠들어 있다.
섬 최북단 미군에 항복하기를 거부한 채 일본군 수백 여명이 뛰어내렸다고 하는 ‘만세 절벽’의 깎아지른 듯한 절경은 그래서 더 아찔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엔 전쟁 후 일본인들이 세웠다는 일본군 충혼탑이 미국령에서 불끈 솟아올라 있다.
건너편 섬 티니안에서는 미군이 일본의 백기 투항을 받아냈던 원자폭탄의 저장고가 있다. 종전의 희생양이 됐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입장에선 이곳이 재앙의 시발점인 셈이다. 이 아름다운 열대 산호섬을 뒤로 한 채 날아간 미 폭격기 B-29는 일본 열도에서 수 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당시 일제에 의해 강제로 징용된 한국인들의 후손도 만날 수 있다. 적도 태양 아래 사탕수수밭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다 숨져간 조선인들. 그 후손인 한국계가 지금도 섬 인구의 20%에 육박한다. 김씨를 음차한 킹씨 등 섬 주민들 사이에선 한국계 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14개의 섬으로 구성된 북마리아나 제도지만 현재 사람이 거주하는 곳은 사이판, 티니안, 로타 세 곳뿐. 그 가운데 로타는 농경지와 목장으로 이용되고 있어 북마리아나제도의 관광지는 사실상 사이판과 티니안 두 곳이다.
티니안은 사이판에 비해 개발이 덜 된 편이다. 여행객들로 북적대는 사이판이 즐거운 사람에게는 티니안은 상대적으로 매력이 떨어지는 섬일 수도 있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선 빠듯한 사이판의 일정에 지친 눈을 달래기에 부족함이 없다. 사이판에서 페리로 한 시간, 경비행기로는 10분 거리에 있다.
1960년대부터 가축 방목을 시작한 티니안은 사이판에 비해 사람의 손길을 덜 탄 풋풋한 자연이 매력이다. 어린 시절 찾아갔던 시골 할머니 댁을 열대 지역으로 옮겨놓은 느낌이랄까.
티니안을 방문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바로 섬 북동부 출루비치의 ‘스타샌드’ 스타샌드는 말 그대로 별 모래다. 풍화 작용을 거쳐 한 알 한 알 완벽한 별 모양으로 깎인 산호조각들이 모여 백사장을 대신하고 있다. 풀밭에서 네 잎 클로버 찾듯 백사장에 엎드린 피서객들의 모습이 여기저기 눈에 들어온다. 손바닥으로 눌러서 별점을 보기도 하는데 별 모래가 손에 많이 붙을수록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티니안에 하나뿐인 산호세 마을 부근엔 거석 유적 ‘타가 하우스’가 있다. 머나먼 과거 바다 건너에서 이 섬으로 온 거인 왕 타가의 집이란 뜻이다. 불세출의 완력으로 일대를 지배한 타가는 커다란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집을 지어 살았다고 전해진다. 현재 타가 하우스라 불리는 곳은 그 집터인 셈이다. 거대 석조 유물은 근방 마이크로네시아 섬에서 종종 볼 수 있는데 티니안의 타가 하우스가 그 가운데 가장 크다.
출루비치를 돌아 다시 섬 중부로 내려오면 ‘고래바위’를 만날 수 있다. 머리 위로 물을 뿜어내는 고래처럼 파도가 밀려오는 압력에 해변의 구멍난 바위 틈으로 바닷물이 하늘위로 솟구친다. 날이 좋을 땐 최고 20m까지 뿜어져 나오는 바닷물과 무지개를 구경할 수 있다.
/부산일보=권상국 기자 ksk@busanilbo.com
취재협조= 아시아나항공·마리아나관광청 한국사무소(www.mymarianas.co.kr)
북마리아나제도는 한국에서 3천200㎞ 남짓 떨어진 서태평양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다. 1986년 인근에 있는 괌 섬을 제외한 14개 섬이 모여 미 연방 내 자치정부를 수립했다. 이 북마리아나제도의 주도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이판이다. 크기는 남북으로 약 21㎞, 동서로는 8.8㎞. 거제도의 3분의 1 정도 크기라고 생각하면 쉽다. 인천에서 4시간 남짓 날아가야 한다.
사이판 공항에 내리니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열대 특유의 들쩍지근한 향신료 냄새가 공기에 묻어난다. 게이트마다 떡하니 버티고 있는 차모로인들의 구릿빛 피부와 여기저기 늘어선 현란한 보색의 일본어와 한국어 간판이 미국령이라는 사실을 무색케 한다.
스페인 식민통치의 영향으로 이곳 원주민들 다수는 가톨릭계다. 거리마다 승용차보다는 대가족을 짐칸에 태운 픽업 트럭이 넘쳐난다. 드문드문 트럭의 행렬을 따라 달리다보니 일행을 태운 밴은 어느덧 시속 100㎞. 야자수와 불꽃 나무가 늘어선 차창 밖 열대의 단조로운 풍경은 60㎞를 달릴 때와 체감 상 큰 차이가 없다.
모래 대신 열 흡수가 탁월한 산호가루로 공사한 덕에 시내 곳곳은 높은 기온에도 아지랑이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불쾌지수가 낮다. 배수로 하나 없지만 맹렬한 스콜이 채 지나가기도 전에 빗물이 말라버리는 도로 역시 산호가루의 덕택이란다.
사이판에서의 일정은 섬 서쪽 해안 ‘마이크로 비치’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사이판의 시내라 할 법한 ‘가라판’이 인접해 있고 많은 호텔과 리조트가 이 비치를 끼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일본계 업체지만 한국어 가이드가 충실한 덕에 의사소통 문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쨍하고 부서질 것만 같은 바다를 등 뒤로 마이크로 비치를 즐기고 있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카메라에 담는 족족 작품이다.
‘마나가하 섬’은 마이크로 비치에서 20여분 거리에 있다. 수심 20여m까지 투명하게 비치는 코발트 빛 바다 위로 에메랄드 하나 박아놓은 듯 솟아오른 앙증맞은 섬. 과연 사이판의 진주라 불릴 만하다. 해변에서 출발하는 왕복 셔틀도 있지만 섬까지 가는 패러세일링도 추천할 만하다. 모터보트에 매달려 낙하산과 함께 상공으로 치솟으면 지상에서 미처 보지 못했던 마나가하의 진면목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다. 산호 사이로 물고기들이 지천으로 널린 탓에 허리 정도 잠기는 물가로만 가도 형형색색 열대어들과 헤엄치는 스노클링이 가능하다.
그러나 사이판의 매력을 한꺼풀 열어젖히면 곳곳이 전쟁의 흔적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 미 본토를 직접 타격할 전진기지로서 북마리아나제도의 전략적 가치가 컸던 만큼 이를 둘러싼 전투도 치열했다. 여기저기 물 밑엔 가라앉은 전투기 잔해들이 열대어들의 놀이터가 되어 있는가 하면 수풀 사이로 낡은 대포들이 녹슨 채 잠들어 있다.
섬 최북단 미군에 항복하기를 거부한 채 일본군 수백 여명이 뛰어내렸다고 하는 ‘만세 절벽’의 깎아지른 듯한 절경은 그래서 더 아찔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엔 전쟁 후 일본인들이 세웠다는 일본군 충혼탑이 미국령에서 불끈 솟아올라 있다.
건너편 섬 티니안에서는 미군이 일본의 백기 투항을 받아냈던 원자폭탄의 저장고가 있다. 종전의 희생양이 됐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입장에선 이곳이 재앙의 시발점인 셈이다. 이 아름다운 열대 산호섬을 뒤로 한 채 날아간 미 폭격기 B-29는 일본 열도에서 수 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당시 일제에 의해 강제로 징용된 한국인들의 후손도 만날 수 있다. 적도 태양 아래 사탕수수밭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다 숨져간 조선인들. 그 후손인 한국계가 지금도 섬 인구의 20%에 육박한다. 김씨를 음차한 킹씨 등 섬 주민들 사이에선 한국계 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14개의 섬으로 구성된 북마리아나 제도지만 현재 사람이 거주하는 곳은 사이판, 티니안, 로타 세 곳뿐. 그 가운데 로타는 농경지와 목장으로 이용되고 있어 북마리아나제도의 관광지는 사실상 사이판과 티니안 두 곳이다.
티니안은 사이판에 비해 개발이 덜 된 편이다. 여행객들로 북적대는 사이판이 즐거운 사람에게는 티니안은 상대적으로 매력이 떨어지는 섬일 수도 있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선 빠듯한 사이판의 일정에 지친 눈을 달래기에 부족함이 없다. 사이판에서 페리로 한 시간, 경비행기로는 10분 거리에 있다.
1960년대부터 가축 방목을 시작한 티니안은 사이판에 비해 사람의 손길을 덜 탄 풋풋한 자연이 매력이다. 어린 시절 찾아갔던 시골 할머니 댁을 열대 지역으로 옮겨놓은 느낌이랄까.
티니안을 방문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바로 섬 북동부 출루비치의 ‘스타샌드’ 스타샌드는 말 그대로 별 모래다. 풍화 작용을 거쳐 한 알 한 알 완벽한 별 모양으로 깎인 산호조각들이 모여 백사장을 대신하고 있다. 풀밭에서 네 잎 클로버 찾듯 백사장에 엎드린 피서객들의 모습이 여기저기 눈에 들어온다. 손바닥으로 눌러서 별점을 보기도 하는데 별 모래가 손에 많이 붙을수록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티니안에 하나뿐인 산호세 마을 부근엔 거석 유적 ‘타가 하우스’가 있다. 머나먼 과거 바다 건너에서 이 섬으로 온 거인 왕 타가의 집이란 뜻이다. 불세출의 완력으로 일대를 지배한 타가는 커다란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집을 지어 살았다고 전해진다. 현재 타가 하우스라 불리는 곳은 그 집터인 셈이다. 거대 석조 유물은 근방 마이크로네시아 섬에서 종종 볼 수 있는데 티니안의 타가 하우스가 그 가운데 가장 크다.
출루비치를 돌아 다시 섬 중부로 내려오면 ‘고래바위’를 만날 수 있다. 머리 위로 물을 뿜어내는 고래처럼 파도가 밀려오는 압력에 해변의 구멍난 바위 틈으로 바닷물이 하늘위로 솟구친다. 날이 좋을 땐 최고 20m까지 뿜어져 나오는 바닷물과 무지개를 구경할 수 있다.
/부산일보=권상국 기자 ksk@busanilbo.com
취재협조= 아시아나항공·마리아나관광청 한국사무소(www.mymariana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