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님, 더 이상 높은 곳이 없습니다.” 7월 14일 밤 11시(한국시각 15일 새벽 3시). 25시간의 사투 끝에 루팔벽 정상에 올라 무전으로 전한 등정 보고치고는 너무나도 밋밋하다. 베이스 캠프(BC)에 도착한 지 86일, 한국을 떠난 지 94일만에 이뤄낸 성과여서 벅찬 감회가 치솟아 오를만 했다. 무전기를 통해 전해오는 대원들의 환호 때문에 가슴이 뭉클할만도 했다. 그러나 정상을 뒤흔드는 강풍은 감상에 젖을 틈을 주지 않고 눈물마저 얼려버린 채 어서 내려가라 재촉한다. 영하 22도의 혹한은 남극과 북극 탐험 때도 추위에 잘 견뎌냈다는 나의 자부심을 여지 없이 무너뜨려 버린다. 만년설에 덮힌 둥근 봉우리 위에 김창호(36·세레또레 등산아카데미) 등반대장과 단 둘이 서 있다. ‘내려가느냐 올라가느냐’의 기로에서 갈등했던 제 2차 정상 공격 과정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고도 7,150m의 제4 캠프에 다다른 지 사흘째인 7월 13일. 텐트 문을 열고 왼쪽으로 내려가면 베이스캠프다. 이 경우 아쉽지만 모든 것을 접고 철수해야 한다. 정상에 가려면 ‘우향우’ 해야 한다. 1,000m를 돌파해야 하는데 하늘은 어제와 다름없이 흐리고 눈이 쏟아진다. 대장과 마지막 교신 때 오늘은 날씨와 상관 없이 밤 10시에 텐트문을 나서기로 정리했다. ‘하산’이냐 ‘공격’이냐는 판단은 전적으로 우리 몫이었다. 오전 11시 날씨는 호전될 기미가 전혀 없다. 식량은 이미 떨어졌고 물을 끓일 가스는 오늘이면 동이 난다. 주우평(31·광주전남등산학교 강사) 대원이 폭 500m의 설원에 잡은 텐트 자릴 제외하곤 전 지역에 걸쳐 스노우 샤워와 눈사태가 꼬리를 물고 있고 우리가 머물고 있는 캠프도 이미 위에서 쓸려 내려온 눈에 절반이 파묻혔다. 하지만 ‘감’이 좋았다. 일기예보는 이틀 전부터 기상이 호전될 거라 했었다. 오늘은 좋은 날씨일거라 예상한 마지막 날이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화이트 아웃(white out·눈 표면에 가스가 덮여 원근감이 없어지는 시야상실 상태)이 계속 되지만 여전히 본능이 속삭이는 ‘감’은 좋다. 산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은 이 불확실하고 모호한 본능을 믿고 따른다. 특히 ‘감’은 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위력을 발휘하곤 하는데 지금이 그때인 것 같다. 이성적인 판단으론 내려가야 한다. 체력을 아끼기 위해 조각 잠을 청한다. 일단 출발하면 안전한 지대에 도착하기 전까지 잘 수 없기 때문이다. 오후 8시. 가수면 상태에서 눈을 비비고 하늘을 올려다 본다. 순간 하늘이 열리고 있었다. 구름이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지만 상황은 훨씬 호전된 것이다. 드디어 출발이다. 밤 10시30분 예상 시각보다 30분 늦게 차 한 잔 마시고 김창호 등반대장이 선두에 서서 길을 뚫고 나선다. 신설이 덮힌 설사면은 발자국을 따라 깊게 패이고 이것이 단면을 자르는 칼과 같은 역할을 하여 판상 눈사태를 만들며 추락한다. 14일 새벽 1시, 두 시간이면 도착할 것으로 예상했던 린네(바위 협곡) 초입에 많은 눈이 쌓여 30분이나 지체된다. 깔때기 같은 좁은 통로를 선등자가 오르며 아이젠과 피켈로 얼음을 찍고 바위를 긁을때마다 낙빙과 낙석이 후등자에게 고스란히 떨어진다. 그 폭은 좁은 곳은 1m, 넓은 곳은 10m 가량. 8,000m급 산을 오르는데 길이 이 곳 뿐이라는 사실이 어처구니 없다. 자그마치 500m 이상을 이 파이프 같은 통로를 올라야 한다. 새벽 2시30분. 첫 번째 등정 시도 때 김미곤(33·한국도로공사산악팀) 대원이 사고를 당했던 지점에 도착해 시계와 등반에 필요한 장비를 챙겨 계속 전진한다. 쏟아지는 얼음과 돌덩이 속에서도 로프가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어 큰 위안이다. 고도 7,550m. 이 곳부터는 안전을 위해 설치한 고정 로프가 없다. 지름 6mm, 길이 50m의 로프로 서로를 연결하고 1970년 메스너 이후 아무도 정상에 서지 못한 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얼어붙은 오버행을 지나니 설사면에 동이 터온다. 협곡인지라 해가 들면 위에 쌓인 눈과 얼음이 무더기로 쏟아진다. 중간 확보물을 설치하지 않고 연속등반을 시간을 줄여나간다. 고도 7,600m 지점, 사람의 흔적은 여기서 끝이다. 언제 설치한 지 모를 다른 등반대의 로프와 장비들이 바위에 고정되어 있다. 하지만 통바위라서 잡거나 디딜 부분이 없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밤 8시. 두 시간째 50m 남짓의 바위를 넘지 못하고 있으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오른쪽으로 붙었다.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손톱까지 동원해 바위를 붙잡고 아이젠을 바위틈에 비벼 넣고 올라본다. 확보물을 박을 수 없으니 쉴 수도 없다. 불안한 것은, 나 혼자 떨어지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 충격에 확보자까지 달고 수백m를 추락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실수란 용납되지 않는다. 고도 7,850m, 비로소 위에서 떨어지는 것들의 위험에선 해방됐다. 피할 공간이 없어 알고도 다칠 위험은 낮아졌다는 의미다. 화이트 아웃 때문에 시야가 좁아지고 루트 파인딩도 어렵다. BC에서 공격조의 움직임을 관찰 중인 원정대장의 도움으로 대략의 방향을 정한다. 〔〈【 다시 눈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항상 나쁘게만 작용하지 않는 법. 화이트 아웃과 내리는 눈이 초등자들인 라인홀트 메스너 형제가 겪었던 햇살을 피하게 해 준다. 영하의 기온에서 찌는 듯한 무더위를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 밤 9시 남봉과 주봉을 연결하는 능선상에 올라선다. 린네 초입에서 얼음에 맞은 무릎이 아리고 추락할 때 부딪친 엉덩이가 말을 듣지 않는다. 속도는 더욱 느려진다. 주저앉기를 몇 차례, 정상이다 싶어 고개를 들면 저 만큼 앞에 더 높은 봉우리가 있다. 오르고 보면 또 있고, 20m도 채 안되는 거리가 한없게 길게 느껴진다. 밤 11시 “현조야 여기다. 여기가 정상이야” 강풍 속에서 김 대장이 소리친다. 우모복 속에 품고 온 카메라 2대가 모두 얼어 있다. 정상에 서로를 묶고 온 로프와 협찬사 표식기, 하켄을 박아놓고 사선을 넘나드는 하산을 시작한다. /이현조 루팔대장벽 원정대원·전남대산악회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