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봄은 자전거 뒷바퀴에 묻어온다 - 박용수 수필가·동신여고 교사
2024년 02월 26일(월) 00:00
바람이 차갑습니다. 하지만 볼을 스치는 바람 속에 봄이 섞여 있습니다. 봄은 진즉 척후병을 보내온 게지요.

요 며칠 새, 쩌렁쩌렁 산을 흔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강변 얼음장 깨지는 소리였습니다. 봄은 그렇게 온몸을 부수고 오나봅니다. 그 바람에 버들강아지도 눈을 뜨고, 쑥과 냉이도 쑥쑥 올라오네요.

봄은 산에서도 요란합니다. 춘란은 고개를 뺐고, 생강나무 끝도 노랗습니다. 들판의 봄은 땅에 붙은 키 작은 것들부터 오나봅니다. 장구나물, 개불알꽃들이 반짝반짝 빛납니다. 앞집 할아버지도 마을회관으로 향합니다. 봄은 그렇게 가난하고 소외된 낮은 곳도 지나치지 않고 공평하게, 구석구석 찾아오나봅니다.

좋은 일꾼을 뽑는 게 선거일진데, 온통 비방전이네요. 그 벽보 뒤로 촌로는 두엄을 내고, 서둘러 밭을 가네요. 윗사람들 부디 저 농부들에게 무릎이라도 꿇고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저 부지런함 말입니다.

먼지 낀 자전거를 꺼냅니다. 대추여울(광주천 옛 이름)엔 영춘화나 무등산 복수초도 햇병아리처럼 웅크리고 게으른 저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병풍산 노루귀도 귀를 쫑긋 세웠을 성 싶고, 창평 읍내 담장 위로 매화나 목련도 곧 피겠지요.

봄은 자전거를 타고 옵니다. 자전거를 따라 아지랑이가 피고, 들판은 초록으로 물듭니다. 봄은 내 자전거 뒷바퀴에 묻어 열심히 옵니다. 그러니 방에만 있을 수는 없지요.

잠시 자전거를 세웁니다. 그리고 봄맞이를 합니다. 작은 꽃 한 송이라도 봄은 들여다봄이고 만져봄이며 나눠보고 느껴봄이 진짜 봄입니다. 이왕 가만가만 들여다보고 가슴 깊이 새겨보고 껴안아보고 다정다감 어루만져보는 봄이 더 좋네요. 이번 선거도 이런 봄 같은 사람이 뽑혔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의사 선생님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아픈 사람, 가난한 사람 모두 훈훈한 봄이 되게 말입니다.

페달을 힘차게 밟습니다. 동그라미 두 개를 흔들며 휙휙 달립니다. 봄바람 부는데, 바람 좀 나면 어떻습니까. 내일은 더 좋아지고 따뜻해지겠지요. 겨우내 처진 타이어에 바람을 넣듯 당신의 가슴에 빵빵하게 봄바람을 넣어보십시오. 가슴은 팽팽하게 부풀고, 힘이 불쑥불쑥 솟아날 겝니다. 매일 봄을 만들어 보세요.

자전거를 탑니다. 자기 힘으로 갑니다. 자전거는 스스로 사는 나입니다. 자전거를 타는 동안 온전히 저는 내가 됩니다. 그러니 힘이 나지요.

거칠 것 없는 들판은 무한대의 자유입니다. 언덕길에선 땀도 흘리고, 내리막에서는 그냥 제가 바람이 됩니다. Dust in the wind, 노래가 절로 나옵니다. 이렇게 도시를 벗어난 자전거는 노래를 달고 날개를 단답니다.

중간 중간 고샅이나 논두렁 산비탈에 자주 쉽니다. 어디든 봄이 있으면 멈춥니다. 할머니가 고샅 담에 기대어 봄 햇살을 즐기고 있네요. 다가가 인사하고 눈 맞춤을 합니다. 노란 저고리 하얀 치마, 주름진 입가로 미소가 번지더니, 이내 그 웃음은 수술이 되고 꽃잎이 되어 노란 영춘화(迎春化)로 담에 피어있습니다. 병원이나 요양원에 계신 모든 어르신들이 봄처럼 영춘(迎春)하고 꽃 이름처럼 회춘(回春)하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있으면 쉬고, 꽃이 피어있으면 멈춰서 봄날 그 찰나, 그 황홀을 해찰합니다. 산다는 것은 발견이고 깨달음입니다.

너무 앞서려고 하지 마십시오. 봄은 정말 자전거 뒷바퀴를 따라 느릿느릿 오지만 결코 뒤처져 오는 법은 없습니다. 봄이 부지런히 따라가는데 혹여 당신이 멀리 달아나지는 않는지요. 행복이 사랑이 따라올 수 있도록 어슬렁어슬렁, 사분사분 걸어보십시오.

겨울옷을 털어내고 힘도 낼 일입니다. 까짓 그 힘든 날 없는 이가 있겠습니까. 저 나무도 꽃도 봄 한철을 위해 겨울을 견디어 냈으니, 우리 모두 낡은 것들을 털고 일어나야겠습니다.

새 뜻도 품고, 오늘 하루도 또 열심히 살아보시지요. 나보다 너를 앞세우고, 너보다 우리를 위해 새로운 날들을 맞이할 일입니다. 소(牛)가 외나무다리(一)를 건너는 것이 생(生)이라는데, 까짓 뭐가 두렵습니까. 이깟 외나무다리쯤 자전거를 끌고라도 성큼성큼 봄처럼 건널 일입니다.

누가 뭐래도 새사람, 새봄은 오고 있습니다.
오피니언더보기

기사 목록

광주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