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 의병은 임진왜란 의병, 병자호란 의병보다 외로운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한반도 침략의 야욕을 보인 19세기 말부터 1910년 8월 경술국치까지 일본군의 치밀한 추적과 현대식 무기를 동원한 대규모 공격, 조정의 외면 또는 비협조 속에 재래식 무기를 들고 소수의 병력으로 맞서 오로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광주일보 의병열전(1975.12.1~1977.7.21)에서 다룬 한말 남도 의병장은 기우만, 기삼연, 고광순, 심수택(심남일), 임병찬, 전수용, 이기손, 박영근, 신덕균, 김준, 양진여·양상기 부자, 안규홍, 오성술, 기산도, 황병학, 이대극 등 17명이다.

초야에 묻혀 일자무식의 머슴으로 살던 백성으로 능히 의리를 떨치고 용기를 내 호국의 별이 된 이가 안담살이 안규홍이다. 보성, 순천, 고흥, 화순에서 활동했는데, 신화처럼 그 일화와 무용담이 전해지면서 일본 본토 육군성의 조선 반도 지도에는 전남이 붉게 표시돼 그 위에 ‘안’이라는 글자가 수십 개나 기록돼 있었다. 그만큼 안규홍의 활약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는 의미다. 가난으로 인해 머슴살이로 편모를 공양했던 안규홍은 1879년(고종 16년) 4월 10일 보성 택촌(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안달환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제원, 호는 담산을 썼으며, 죽산 문강공 안방준(임진왜란 및 병자호란 의병장이자 대학자)의 10대손으로 조부 때부터 집안이 기울었다. 끼니마저 잇지 못할 형편에 이르자 어머니 정씨의 공양을 위해 자신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문덕면 내동의 염봉택의 집에 머슴으로 들어갔다. ‘안담살이’는 머슴으로 일할 때 그의 별칭이다.

행랑채에 묵게 된 규홍은 1894년 1월 전라도에서 일어난 동학운동을 체감하며 세상의 변화를 실감하고 동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5세의 소년으로 힘과 민첩성, 담력도 길렀다. 마을 씨름대회에 어린 나이에 우승해 황소 한 마리와 무명베 두 필을 받기도 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규홍은 20여 명의 머슴들을 규합해 대장 노릇을 하며 뒷산에 올라 체력을 연마하기도 했다.

1901년 극심한 흉년이 든 보성에서 관가 공출과 세금은 여전해 백성들이 초근목피로 삶을 연명하고 있었다. 당시 세무원이 내동마을 정자나무 아래 주민들을 모아두고 세금을 걷기 위해 주민들을 개 패듯 두들기고 채찍으로 때렸다. 40여 명의 주민들을 장작 위에 무릎을 꿇게 하는 등 고문까지 하자 규홍은 관리들에게 반격하기 시작했으며 곧 이들을 제압했다. 그는 5명의 세무원을 결박한 뒤 매를 때리고 그들의 잘못을 가르쳤다. 이 같은 행동들이 반복되고 20세가 넘어 성인이 되자 주위 어른이나 동료들이 잘 따르는 지역의 인물이 됐다.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호남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능주 양회일도 200여 명을 이끌고 거병해 능주, 조성 등에서 일본군을 격파했는데 광주의 일본군을 공격하다가 포위 당해 체포됐다. 평소 양회일을 흠모했던 규홍은 충격을 받고 자신이 직접 거병하기로 결심, 머슴들을 규합해 사방으로 무기를 구해 권총 5정을 얻어 준비에 나섰다.

안규홍이 거병 후 첫 전투를 벌여 일본군을 대파한 곳이 보성군 득량면 박실마을이다.

20여 명의 머슴이 생사를 같이 하기로 다짐했으며, 당시 주인집의 못자리판을 만드는 날을 거병일로 정했다. 1908년 3월 각 고을에서 횡행하던 비적들이 내동마을에도 나타나 약탈, 방화 등을 하려하자 규홍이 머슴들과 이들을 쫓아낸 뒤 자신의 주인인 염봉택에게 논일을 하기 위해서는 술과 음식이 필요하다고 말한 뒤 3월 9일 집을 나갔다. 이후 7~8명의 머슴을 데리고 염씨 앞에 나타난 규홍은 거병 사실을 알리고 군량과 물자 조달을 부탁했다. 다른 양반들에게도 이를 요구했으나 거부하는 일부 양반들은 권총으로 위협한 뒤 충분한 곡식과 의복을 마련했다. 규홍과 머슴들은 보성 동소산에 올라가 대오를 정비하고 각 부서를 정한 뒤 격문을 돌리고 거병 사실을 주위에 알렸다. 그러나 동네 선비들은 참여를 거부하고 머슴이나 농민들만 몰려들었다.

서울에 사는 전략가 오주일이 규홍의 인물됨에 감명해 수십 명을 데리고 합류했으며, 염재포, 이관회, 임병국, 손덕호, 정기찬, 장재상, 송경회, 안택환 등도 함께 했다. 절대 다수의 추대로 대장에 오른 규홍은 부장에 총을 잘 쏘는 염재보, 선봉에 이관회, 좌익에 임병국·정기찬, 우익에 장재상·송경회, 후군에 안택환·소휘천, 참모에 오주일·나창운, 서기에 임정현, 운량관에 박제현 등을 임명했다. 이후 일본군을 선제공격하기로 하고 농사꾼으로 변장해 순천, 벌교 등에 주둔한 일본군의 동태를 살폈다. 규홍은 보성읍에서 8km 떨어진 득량면 박실 호곡(파청이라고 불림)을 기습 공격할 장소로 정한 뒤 80여 명을 배치하고 순천 주둔 일본군들이 관할지구를 순찰하기를 기다렸다. 마침 일본군 대장 미토와 히라이가 이끄는 일본군이 접근해왔으며, 이에 총탄을 퍼붓고 도망가려는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한 규홍은 미토와 히라이를 사살하는 첫 전과를 올렸다. 박실주민들까지 몰려 나와 규홍의 승리를 축하하면서 음식을 내놓고 백발의 양노인은 무명베 10필과 100냥을 건네기도 했다. 의로운 군사에 의로운 백성으로, 의병과 주민들은 물과 물고기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동소산으로 돌아온 규홍은 각계에 사람들을 보내 일본군의 정보를 파악하고, 의병들을 모았다.

지략과 담력을 갖춘 젊은 강성인이 20여 명의 군사를 데리고 합류했으나 강성인이 주민들을 약탈하고 재물에만 관심을 보이자 규홍은 왜적보다 못된 놈이라고 호통치며 군사들 앞에서 강성인의 목을 쳤다.

이후 화순 동복의 일본군을 기습하기로 한 규홍은 농사꾼으로 변장해 적의 동정을 살폈다. 3일간 동복에 잠입하며 정보를 입수한 그는 소대장 와타나베가 4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있고 친일파 인사들이 진지를 오가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진지로 돌아와 부장 염재보에게 50명과 함께 운홀치라는 언덕에 매복할 것을 지시하고 일본군 유인 작전에 들어갔다. 규홍은 일본군이 정기적으로 순찰을 돈다는 사실을 알고 인근 상진산에 올라 수십 벌의 무명 저고리를 나무에 걸치고 총을 꺼내 마을을 향해 발사하게 했다. 친일파들은 의병이 나타났다며 일본군 진지에 보고했고, 이에 30여 명의 일본군이 운홀치에 이르렀을 때 매복한 의병들의 공격이 시작됐다. 4~5명의 사상자를 낸 일본군은 대오를 정비해 조직적인 공세에 나섰으며, 이에 후퇴한 규홍은 일본군 막사와 무기 창고 등으로 향했다. 일본군이 상진산에 내걸린 무명 저고리들을 의병으로 착각해 추적한 사이 일본군 근거지로 내려와 불을 지른 것이다.

군량이나 무기, 의복 등의 조달에 어려움을 겪던 규홍에게 보성군 복내면 반곡리에 사는 죽산 안씨 안극이 지원에 나섰으며, 과거 집주인이었던 염봉택도 곡식과 의복 등을 후원했다. 그러나 이들 모두 일본군에게 끌려가 고초를 당하자 규홍은 미리 양해를 구한 뒤 안극과 염봉택의 집을 습격한 것처럼 꾸며 곡식 등을 챙겨 달아났다. 1908년 5월 15일 순천 송광면 대곡리의 일본군 초소를 습격했는데, 1시간 여의 총격전 끝에 일본군 수십 명을 죽였다. 이후 규홍은 보성군 복내면 진봉리 서봉에서 하룻밤을 쉬어 가려했는데, 일본군이 습격해오면서 새벽 5시부터 오전 8시까지 3시간 동안 전투를 벌였다. 이 싸움에서 규홍은 처음으로 패배, 겨우 20여 명의 의병만 남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규홍은 도망쳤다가 다시 서봉으로 이동, 전사자들을 묻고 위령제를 지냈다.

안규홍은 순천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수비군과 경찰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사진은 순천왜성.

서봉 전투 직후 전사자와 부상자의 가족들로부터 원망을 받기도 했으나, 규홍이 위령제를 지내고 일일이 유족들을 찾아가 위로하자 주민들의 원망은 흠모로 바뀌었다. 흩어진 의병들이 다시 모여들고 자식이 전사하자 아버지가 찾아오고, 형이 동생을 격려해 데리고 왔으며, 부녀자들은 도시락과 간장병을 머리에 이고 찾아왔다. 다시 세력을 얻은 규홍은 1908년 6월 23일 순천 송광면 동복분견소 소속 헌병 2명을 사살하고, 나주·함평에서 활약하고 있던 심수택과 연합전선을 구축하며 다시 기세를 올렸다.

1908년 남도 의병의 세가 커지자 일제의 육군성 대구 주둔 육군사령부가 전남지방의 의병부대 토벌을 긴급지시하고, 전남에만 2만여 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또 일제의 강압으로 조정은 당시 덕망 높은 선비 무정 정만조를 선무사로 광주에 내려보내 읍성 북문 앞에서 주민들을 모아 의병의 잘잘못을 거론하며 소위 선무공작을 벌였다. 이에 광주 주민들은 정만조에게 ‘매국노’, ‘일본의 앞잡이’라고 소리치며 항의해 일대가 아수라장이 됐으며, 정만조는 순사대의 호위를 받으며 고개를 숙인채 사라졌다. 8월 들어 규홍은 일본군을 상대로 야간기습을 계속 감행했는데, 이에 일본군은 부대를 보강해 포위한 채 총공격했으나 규홍의 부대는 유유히 사라졌으며, 순천 주암 광천리에서도 일본 수비군·경찰을 만나 전투를 벌였다. 9월에는 고흥에서 정박중인 일본 선박을 기습해 쌀 100섬과 집기를 획득하고, 녹동에서 쌀을 일본으로 실어나르던 일본 선박 10여 척도 불살라버렸다. 10월 3일에는 숯장수로 분장해 복내장터에서 기마대 막사로 들어가 일본 기마병 4명을 잡아 죽였다. 막사의 서류를 모두 불태우고 소총 7정, 탄환, 4필의 말까지 노획해서 나오는 등 대담한 행동으로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일본군 역시 규홍을 한반도 제일의 괴수로 경계하기 시작했는데, 보성군 문전면 용암리 우치에서 일본군 30여 명과 조우해 대혈전을 벌였다. 전투가 길어지자 일본군은 순천에 지원을 요청했으며, 규홍은 이에 의병을 6~7개의 소부대로 편성해 보성, 문덕, 고흥, 강진, 화순 등에 보내면서 순천의 일본군을 분산시키려했다. 또 자신은 정예부대를 이끌고 순천의 일본군 본진을 공략하기 위해 순천 병치에 출동했으나 이 같은 의병의 이동 정보가 일본군에게 노출되면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일본군에게 3~4겹으로 포위당했다. 규홍을 따라오던 임창모와 그 부하들이 후방에서 일본군에게 달려들자 일본군이 잠시 승주 방면으로 후퇴했는데, 다시 전투가 이어지면서 갈수록 치열해져 이관회, 안택환 등이 전사했다. 규홍은 보성 득량면 박실마을로 진을 옮겼는데, 이 마을은 100여 호의 큰 마을로 제주 양씨가 주로 거주했다. 주민들은 음식을 준비해 의병들을 대접하고 일본군 정보도 알려줬는데, 때마침 일본군이 마을 앞을 지나가자 바로 공격에 나서 도주하던 일본군을 안치라는 고개에 매복해 있던 소휘천이 맡아 다시 타격을 가했다. 1909년 4월 진도, 완도, 장흥, 강진 등의 포구로 나아갔는데, 4월 2일에는 강진군 도암면 주재소와 쌀가마를 싣던 일본 선박 10여 척을 공격하고, 4월 3일에는 장흥 천산면 용반리에서 친일파 박대홍, 방입서 등을 처형했다.

1909년 4월 일본군은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나서는데, 광주와 능주에 주둔한 일본수비대가 4월 24일 화순 남면 사평장과 보성군 복내면 복내장 부근을 수색하고, 26일 오전 순천 주암면 광천리과 복내장의 중간지점인 송광면 우산리에 집합해 능주의 수비대장 에이구치 대위의 지휘로 보성, 장흥 방면으로 출동했다. 남원, 구례, 순천의 각 수비대 역시 의병을 색출하기 위해 곳곳을 뒤졌다. 전라도 의병부대를 괴롭힌 토미이시 부대가 규홍을 뒤쫓자 규홍은 의병을 5~6명씩 소부대로 편성한 뒤 상인으로 변장시켰다. 이어 5월 23일 밤 보성군 노동면에 나가 능주수비대를 습격, 요나하 등 5~6명을 사살하고, 5월 24일 오후에는 보성읍에서 가와구치가 이끄는 광주수비대와 교전해 헌병 등을 사살했다. 7월 들어 보성, 장흥, 광양, 진도, 완도, 고흥, 순창에까지 진출하는 등 신출귀몰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의병의 부모, 형제, 처자 등을 강압해 귀순공작을 펴면서 의병들이 도주하는 등 점차 의병의 수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이에 규홍은 더 이상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 30여 명의 의병을 모아 해산을 선언했다. 이후 어머니에게 문안을 드리기 위해 보성군 문덕면 양동리를 찾았다가 이를 밀고한 자로 인해 1909년 9월 25일 오전 9시 체포돼 광주로 압송됐다. 대구감옥으로 이감된 그는 1911년 5월 5일 31세의 나이에 순국했다. 대구에 가매장됐다가 보성군 조성면 은곡리로 이장된 규홍에게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