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걷기 좋은 도시 위해 바꿔야 할 기준
2022년 02월 09일(수) 03:00 가가
건물 낮추고 도로 폭 좁아져야 즐겁고 편안하게 걸을 수 있어
보도에서 진출입 가능한 주거용 건물 1층 상가 활용
좁은 도로, 신호대기시간 줄어 차량운행자도 편리
차량중심에서 사람중심으로…도시계획 기준 바꿔야
보도에서 진출입 가능한 주거용 건물 1층 상가 활용
좁은 도로, 신호대기시간 줄어 차량운행자도 편리
차량중심에서 사람중심으로…도시계획 기준 바꿔야
신도시는 살기 편해 보인다. 넓은 광로부터 좁은 소로까지 유기적으로 연결된 격자형 도로망 체계를 갖추고 있어서다. 도로가 둘러싼 네모난 공간에는 고층 아파트와 상가건물, 학교 등 공공시설이 배치된다. 물길이나 산 등 자연지형을 따라 공원도 조성된다. 실제로 신도시의 아파트가 주변 아파트보다 매매가나 임대료가 높은 편이니 이왕이면 신도시에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신도시의 모습은 어딜 가나 비슷하다. 대표적인 1기 신도시인 경기도 일산, 분당, 평촌의 거리 풍경은 20년 뒤에 지어진 동탄, 30년 뒤에 지어진 위례 신도시 거리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넓은 도로, 네모난 아파트, 네모난 상가건물, 비슷하게 지어진 학교 등 큰 틀에서 도시의 외모나 인상은 다르지 않다. 마치 신도시는 이렇게 지어야만 하는 규정이 있는 듯하다. 같은 풍경의 ‘K-신도시’는 한국을 넘어 외국으로도 수출된다고 한다. 그만큼 장점이 많은 도시임에 틀림없다.
우리나라 신도시의 가장 큰 장점은 집적의 이익을 충분히 활용하는 데 있다. 고밀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이용하기 편리한 위치에 상가건물을 배치한다. 이 건물에는 슈퍼마켓, 제과점, 카페뿐만 아니라 우체국, 동사무소, 학원, 스포츠센터 등 다양한 상점이나 시설이 들어선다. 거의 모든 도시 활동이 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밖에 없고 그만큼 상가 매출도 올라가기 쉬운 구조다. 공간 효율성 측면에서 이만한 설계는 없어 보인다.
신도시에서는 자동차를 이용하기도 편리하다. 8차로 이상의 넓은 간선도로가 도시의 골격을 형성하고, 4차로의 집분산도로가 단지를 연결하며 폭 10m 내외의 국지도로가 개별 건물을 연결한다. 신도시 안에서는 특별한 장소와 시간을 제외하면 차가 막힐 일도 거의 없다. 아파트와 상가에는 지하 주차장을 넓게 조성해 주차하기도 편리하다. 주차비 부담도 미미한 수준이다. 차를 가지고 있다면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이런 장점 때문에 잃어버리는 가치도 있다. 자동차 위주의 고밀 도시개발이 효율성을 높이지만 차 이외의 교통수단을 이용하기에는 불편하다. 특히 사람이 즐겁고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든다. 걷기는 산책이나 운동을 위한 특별한 활동으로 간주된다. 그래서인지 신도시에 도보 산책 코스는 잘 마련되지만 걷기를 일상의 교통수단으로 여기는 도시계획은 충분히 고려되지 못하고 있다.
신도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 주차장에서 차를 이용해 걷기에는 다소 멀고 차를 타기에는 가까운 애매한 거리의 상가건물로 이동한다. 상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아래로 움직여 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강화된다. 실내에서 상가에서 상가로 이동하니 그만큼 거리를 오가는 사람은 줄어든다. 걷는 계층은 주로 차를 이용할 수 없는 어린이, 청소년과 고령자이다.
같은 상가건물에 있더라도 보도에서 진출입이 가능한 1층 상점은 여전히 보행자에게 매력적이다. 다만 충분하지 않다. 만약 고층 상가건물을 좀 낮추고 대신 주변 주거용 건물의 1층을 상가로 이용하면 어떨까? 재미있게 걸을 수 있는 거리가 그만큼 늘어날 것이다. 신도시의 단독주택지구 중 1층에 근린생활시설이 들어설 수 있는 지구 내 거리가 카페골목이니 먹자골목이니 하는 이름으로 변모하는 이유도 1층에 상업시설 수요가 그만큼 많다는 점을 방증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걷기 좋은 도시가 되려면 걷기를 통해 일상의 도시생활을 할 수 있도록 계획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자면 한 곳에 집중된 상업 시설의 일부를 주변 건물의 1층으로 분산시키는 방안을 찾으면 좋을 것이다. 가령 현재 10층 정도인 상가건물을 3~4층 정도로 낮추면서 나머지는 주변 도로변 아파트 등의 1층에 위치시킬 수 있다. 상업시설의 적절한 집중과 분산을 동시에 꾀하는 전략이다. 이렇게 되면 상가건물 실내를 걷던 사람들이 햇볕과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거리를 더 이용하게 된다. 물론 한여름이나 추운 겨울, 눈비가 많은 시기에는 야외 거리를 걷는 것이 힘들 수 있다. 하지만 상가건물 내부에 거의 모든 도시기능을 배치하는 지금의 일률적인 계획 방식도 지나친 측면이 있다. 상가건물의 경제적 효율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다만 걷기 좋은 도시를 만들 려면 옥외에서 접근할 수 있는 상업 시설이 지금보다 많아져야 한다. 그래야 더 다양한 도시 공간을 갖게 될 것이다.
이렇게 걷기 좋은 도시가 되려면 기존의 도시계획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선 지금처럼 높은 층수를 디폴트 옵션으로 하면 안 된다. 건물이 높지 않아도 된다면 도로가 지금처럼 넓을 필요가 없다. 한꺼번에 도로를 이용하는 교통량이 훨씬 줄어들기 때문이다. 건물이 낮아지고 도로가 좁아지면 그만큼 걷기에 좋아진다. 파리나 런던의 거리를 걸으며 느끼는 편안함을 우리 도시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도시의 필요성은 많은 도시 전문가들이 공유하고 있다. 알지만 제대로 구현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가장 큰 이유가 기존의 도시계획 기준을 벗어나는 두려움 때문이라 생각한다. ‘도시·군관리계획수립지침’ 등에서 30%까지 도로율을 확보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수치에 가까와야 좋은 도시라는 인식이 생긴다. ‘도시계획시설의 결정·구조 및 설치기준에 관한 규칙’이 규정한 70m 이상의 광로 계획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관행에서 벗어나려면 기존의 도시계획이나 시설 지침을 보완하는 새로운 도시계획 지침이 만들어져야 한다. 보행자 위주의 도시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과감한 변화를 용인하는 규정이 있어야 한다. 넓은 블록이나 가구분할 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근거, 8차로 이상의 넓은 도로를 지금보다 줄이고 4차로나 2차로 중심의 도로체계로 바꿀 수 있는 근거가 필요하다. 도시계획 단계에서 버스간선급행시스템(BRT), 트램, 지하철 등 대중교통이 도시의 주요 거점을 연결하는 노선을 고려하도록 하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소신있는 계획가라 하더라도 이런 근거가 없다면 나중에 어떤 책임을 질지 모를 모험을 시도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런 변화 없이 좋은 도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건물의 높이가 낮아지고 도로가 좁은 도로는 과연 차에게 불리하고 보행자에게만 좋은 것일까? 분명 보행자는 길이 좁아지면 길을 건너다 차에 치일 가능성이 줄어들어 좋다. 하지만 차를 이용하는 사람에게도 좋다. 신호대기시간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넓은 도로와 넓은 도로가 만나면 그만큼 교차로가 넓어지고 차량의 신호대기시간이 늘어난다. 하지만 좁은 도로가 서로 만나는 곳에서는 차량의 신호대기시간이 짧아진다. 회전교차로로 바꾸면 영국 밀턴 케인즈처럼 신호등이 없는 도시도 만들어낼 수도 있다. 대기시간이 크게 줄어들면 오히려 전체적인 통행속도는 전보다 빨라질 수 있다.
도시계획 기준을 바꾸면 실제로 다른 설계가 가능함을 보여주는 연구도 있다. 정해진 도시계획 기준에 따르다 보니 신도시 단독주택지구의 가로망 체계와 가구분할은 어느 곳이나 비슷하다. 하지만 이런 기준에서 벗어나 순서만 바꾸어도 전혀 다른 도시설계가 가능하다.
가령 단독주택지구 1층에 연이어 들어선 상가들의 모습은 기존의 일산 신도시 단독주택지 설계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보여준다. 왼쪽 설계(그림 1)는 단독주택지 블록을 격자형으로 가구 분할한 현재의 모습이다. 오른쪽(그림 1)은 학교, 버스정류장, 상가 등을 연결하는 보행자도로 네트워크를 우선 배치한 후 가구분할과 도로를 나중에 설계한 경우이다. 순서만 바꾼 것이지만 같은 가구수를 유지하면서도 전혀 다른 도시의 모습을 만들 수 있다. 훨씬 차로부터 안전하고 쾌적한 주거공간을 만들 수 있다. 필지의 모양도 다양하다. 공동주차장도 마련된다면 아파트 못지않은 생활공간이 될 것이다.
도시는 우리의 욕망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그동안 우리는 자동차가 중요하다는 인식에 차가 다니기 좋은 도시를 선망했었다. 하지만 점점 차에서 벗어나 걷기 좋은 도시가 더 살기 좋은 도시라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 그런 도시를 만들려면 그릇의 모양을 결정짓는 틀을 바꾸어야 한다. 새로운 도시계획 기준을 만들려는 진지한 논의가 필요한 이유다.
한상진
서울대 환경대학원 환경계획학과 부교수
영국 UCL 교통학 박사
전 한국교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전 OECD/ITF Policy Analy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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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계획 기준을 바꾸면 다른 설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 기존 설계<왼쪽>와 보행자 도로 우선 설계(한상진·이해선·이혜진의 ‘보행자 연구를 위한 단독주택지구 가로망 계획 개선 방안 연구’ 한국교통연구원.<그림 1> |
우리나라 신도시의 가장 큰 장점은 집적의 이익을 충분히 활용하는 데 있다. 고밀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이용하기 편리한 위치에 상가건물을 배치한다. 이 건물에는 슈퍼마켓, 제과점, 카페뿐만 아니라 우체국, 동사무소, 학원, 스포츠센터 등 다양한 상점이나 시설이 들어선다. 거의 모든 도시 활동이 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밖에 없고 그만큼 상가 매출도 올라가기 쉬운 구조다. 공간 효율성 측면에서 이만한 설계는 없어 보인다.
신도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 주차장에서 차를 이용해 걷기에는 다소 멀고 차를 타기에는 가까운 애매한 거리의 상가건물로 이동한다. 상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아래로 움직여 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강화된다. 실내에서 상가에서 상가로 이동하니 그만큼 거리를 오가는 사람은 줄어든다. 걷는 계층은 주로 차를 이용할 수 없는 어린이, 청소년과 고령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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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신도시 상가 건물은 네모난 10층 규모로, 여러 상가가 입주한다. 경기도 위례 신도시 상가 건물. |
걷기 좋은 도시가 되려면 걷기를 통해 일상의 도시생활을 할 수 있도록 계획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자면 한 곳에 집중된 상업 시설의 일부를 주변 건물의 1층으로 분산시키는 방안을 찾으면 좋을 것이다. 가령 현재 10층 정도인 상가건물을 3~4층 정도로 낮추면서 나머지는 주변 도로변 아파트 등의 1층에 위치시킬 수 있다. 상업시설의 적절한 집중과 분산을 동시에 꾀하는 전략이다. 이렇게 되면 상가건물 실내를 걷던 사람들이 햇볕과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거리를 더 이용하게 된다. 물론 한여름이나 추운 겨울, 눈비가 많은 시기에는 야외 거리를 걷는 것이 힘들 수 있다. 하지만 상가건물 내부에 거의 모든 도시기능을 배치하는 지금의 일률적인 계획 방식도 지나친 측면이 있다. 상가건물의 경제적 효율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다만 걷기 좋은 도시를 만들 려면 옥외에서 접근할 수 있는 상업 시설이 지금보다 많아져야 한다. 그래야 더 다양한 도시 공간을 갖게 될 것이다.
이렇게 걷기 좋은 도시가 되려면 기존의 도시계획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선 지금처럼 높은 층수를 디폴트 옵션으로 하면 안 된다. 건물이 높지 않아도 된다면 도로가 지금처럼 넓을 필요가 없다. 한꺼번에 도로를 이용하는 교통량이 훨씬 줄어들기 때문이다. 건물이 낮아지고 도로가 좁아지면 그만큼 걷기에 좋아진다. 파리나 런던의 거리를 걸으며 느끼는 편안함을 우리 도시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도시의 필요성은 많은 도시 전문가들이 공유하고 있다. 알지만 제대로 구현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가장 큰 이유가 기존의 도시계획 기준을 벗어나는 두려움 때문이라 생각한다. ‘도시·군관리계획수립지침’ 등에서 30%까지 도로율을 확보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수치에 가까와야 좋은 도시라는 인식이 생긴다. ‘도시계획시설의 결정·구조 및 설치기준에 관한 규칙’이 규정한 70m 이상의 광로 계획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관행에서 벗어나려면 기존의 도시계획이나 시설 지침을 보완하는 새로운 도시계획 지침이 만들어져야 한다. 보행자 위주의 도시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과감한 변화를 용인하는 규정이 있어야 한다. 넓은 블록이나 가구분할 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근거, 8차로 이상의 넓은 도로를 지금보다 줄이고 4차로나 2차로 중심의 도로체계로 바꿀 수 있는 근거가 필요하다. 도시계획 단계에서 버스간선급행시스템(BRT), 트램, 지하철 등 대중교통이 도시의 주요 거점을 연결하는 노선을 고려하도록 하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소신있는 계획가라 하더라도 이런 근거가 없다면 나중에 어떤 책임을 질지 모를 모험을 시도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런 변화 없이 좋은 도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건물의 높이가 낮아지고 도로가 좁은 도로는 과연 차에게 불리하고 보행자에게만 좋은 것일까? 분명 보행자는 길이 좁아지면 길을 건너다 차에 치일 가능성이 줄어들어 좋다. 하지만 차를 이용하는 사람에게도 좋다. 신호대기시간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넓은 도로와 넓은 도로가 만나면 그만큼 교차로가 넓어지고 차량의 신호대기시간이 늘어난다. 하지만 좁은 도로가 서로 만나는 곳에서는 차량의 신호대기시간이 짧아진다. 회전교차로로 바꾸면 영국 밀턴 케인즈처럼 신호등이 없는 도시도 만들어낼 수도 있다. 대기시간이 크게 줄어들면 오히려 전체적인 통행속도는 전보다 빨라질 수 있다.
도시계획 기준을 바꾸면 실제로 다른 설계가 가능함을 보여주는 연구도 있다. 정해진 도시계획 기준에 따르다 보니 신도시 단독주택지구의 가로망 체계와 가구분할은 어느 곳이나 비슷하다. 하지만 이런 기준에서 벗어나 순서만 바꾸어도 전혀 다른 도시설계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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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주택지구 1층에 연이어 들어선 상가. 반대편 골목길은 주차공간이 크게 부족하다. |
도시는 우리의 욕망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그동안 우리는 자동차가 중요하다는 인식에 차가 다니기 좋은 도시를 선망했었다. 하지만 점점 차에서 벗어나 걷기 좋은 도시가 더 살기 좋은 도시라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 그런 도시를 만들려면 그릇의 모양을 결정짓는 틀을 바꾸어야 한다. 새로운 도시계획 기준을 만들려는 진지한 논의가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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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환경대학원 환경계획학과 부교수
영국 UCL 교통학 박사
전 한국교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전 OECD/ITF Policy Analy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