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마한 옹관묘
2020년 07월 01일(수) 00:00
영산강유역 마한 사회에서는 왜 목관 대신 옹관을 썼을까?
썩지 않는 옹관으로 시신 보호
다양한 토기 제작 기술력 바탕

영산강유역 마한 옹관 (2003년 국립광주박물관)

지난 글 <12>에서는 분구묘라 불리는 마한의 무덤을 소개하였다. 가장 큰 특징은 하나의 지상 분구에 목관, 옹관, 석실 등을 써서 여러 사람을 묻는 것인데, 살아있는 사람을 죽여 주인과 함께 묻는 순장과 달리 시간차를 두고 사망한 가족들을 추가해서 묻었다는 점이 특별하다.

영산강유역에서는 대형 옹관 여러 개가 묻힌 거대한 분구묘들이 이곳저곳 분포하고 있어 오래전부터 관심을 끌어 왔는데 1917년의 첫 공식 발굴에서는 금동관이 나오기도 하였다.

소아 사망률이 높았던 시기에는 전세계적으로 죽은 아이를 일상용 항아리에 넣어 묻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우리나라에서는 근세까지 어린 아이를 그렇게 묻기도 하였다. 하지만 성인을 옹관에 넣어 묻는 것은 드문 일이었는데 왜 영산강유역의 마한 사회에서는 특별히 대형 옹관을 제작하여 성인을 묻었을까?

중국 옹관 (2017년 황화시박물관)
◇영산강유역 마한의 대형 옹관묘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옹관묘가 사용되었지만 청동기시대까지는 지역에 따라 제한적으로 사용되었을 뿐이고 삼한 사회가 시작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삼한 사회의 옹관묘는 기존 옹관묘와 별도로 발해만 지역의 철기문화가 확산되면서 목관묘와 함께 파급되었다. 목관묘는 성인용으로 사용되고 옹관묘는 소아용으로 사용되면서 같은 묘역에 공존하였다.

영산강유역의 마한 사회에서는 3세기초부터 성인용 대형 옹관묘를 쓰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목관으로 시작되었던 분구묘에 옹관이 추가되다가 점차 목관 대신 옹관이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이와같은 현상은 같은 시기 국내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영산강유역 마한 사회의 가장 큰 특징으로 알려져 왔다.



일본 옹관 (2016년 후쿠오카시립박물관)
◇대형 옹관묘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성인용 대형 옹관묘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밝혀져 있지 않다. 옹관이 알과 같이 부활을 의미한다고 보고 생과 사를 단절로 보지 않는 사생관에 기인하는 것으로 본 견해가 오래전에 나온 바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와같은 사생관은 대형 옹관묘가 없는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영산강유역에서만 대형 옹관묘가 성행하였던 까닭을 충분히 설명해 주기 어렵다. 아마도 여러 요인들이 복합되어 있을 것이며 크게 3가지 요인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첫째는 기술적 요인이다. 당시 영산강유역에서는 양질의 황토를 이용하여 다양한 종류의 토기들이 제작되었는데 수확한 곡물을 저장하기 위해 대형 항아리도 많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대형 옹관을 제작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광주 쌍촌동유적을 비롯하여 함평 소명유적 등지의 주거지에서 곡물 저장용 대형 항아리들이 확인되고 있는데 그 규모나 형태에 있어 성인 매장용 초기 옹관과 큰 차이가 없다. 이는 곡물 저장용 대형 항아리와 성인 매장용 초기 대형 옹관이 서로 관련이 있음을 말해 준다.

둘째는 경제적 요인이다. 대형 옹관을 만드는 것은 목관이나 목곽을 제작하는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월하였기 때문에 적은 노력으로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목관이나 목곽의 제작에 있어서는 큰 나무를 골라 베어내고 운반하는 것을 비롯하여 판재로 만들어 관을 짜는 과정에 많은 인력이 필요하였다. 하지만 옹관은 대형이라 할지라도 그 제작에 있어서는 주변의 황토를 손쉽게 이용할 수 있고 땔감 역시 인근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을 것이므로 다른 지역에 비해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셋째는 문화적 요인이다. 영산강유역에서는 하나의 분구묘를 같이 쓰는 가족장이 성행하였기 때문에 추가장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기존에 안치되었던 목관이나 목곽이 썩고 시신이 훼손되는 상황을 목격하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더 이상 시신이 훼손되지 않는 방안을 찾는 것은 당연한 도리였을 것이고 썩지 않는 항아리가 대안이 되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일상용 대형 항아리를 이용하다가 점차 내부적인 전통을 확보하면서 목관이나 목곽을 대체하고 전용 옹관으로 발전하였을 것이다. 함평 만가촌 고분은 목관으로 시작되어 목관이 추가장되다가 목관 대신 대형 옹관이 추가장되고 결국 대형 옹관이 중심이 되는 영산강유역 옹관 분구묘의 변화 과정을 잘 보여준다.



베트남 옹관 (2009년 호이안시박물관)
◇중국, 베트남, 일본 대형 옹관과의 관계

우리의 옹관묘는 시작과 확산에 있어 시기별, 지역별 차이가 있다. 삼한 시기까지 성행하였던 소아용 옹관묘는 황해 연안지역에서 먼저 시작하였다는 점에서 해양을 통한 확산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산강유역 마한 사회에서 성행하였던 대형의 성인용 옹관묘는 국내에서는 유일한 것이지만 황해 건너 가까운 중국 산동지역과 남해 건너 가까운 일본 규슈지역에서 확인되고 있고 멀리 베트남 동남지역에서도 확인되고 있기 때문에 상호 관련 가능성에 대해 검토가 필요하다.

중국 산동지역에서는 가장 이른 시기인 전국시대부터 진한시기에 이르기까지 소아용 뿐만 아니라 성인용 옹관묘가 사용되었다. 따라서 중국 산동지역 옹관묘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일본이나 베트남 옹관묘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아직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은 없다.

중국 산동지역의 성인용 옹관묘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미루어 보아 동아시아 성인용 옹관묘의 기원이 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겠지만 바다를 사이에 둔 서로 비슷한 사회적, 문화적 배경에서 시간차를 두고 각각 독립적으로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더 높을 것으로 생각된다.

영산강유역 마한 사회를 상징하는 대형 옹관묘의 기원을 규명하는 일은 이 지역 마한 사회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중요한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시기에 비슷한 옹관문화를 영위하였던 고대 동아시아 지역간의 상사성과 상이성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전남대 문화인류고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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