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이 꺼지자 무대에는 화려한 선과 색의 영상이 펼쳐진다. 능수능란한 줄꾼의 묘기와 한바탕 왁자한 마을 잔치가 탄성을 자아내더니, 와이어를 활용한 플라잉 특수 효과가 하늘을 가른다. 바닥이 꺼지고 벽이 열리는 판타지들이 쉬지 않고 무대를 주름잡는다. 넌버벌 퍼포먼스 ‘무사’의 시선을 압도하는 풍경들이다.

넌버벌 퍼포먼스란 비언어극과 행위 예술을 근간으로 하는 퍼포먼스가 결합된 공연 장르를 말한다. 말이 배제됐으니 국경이나 언어의 경계를 초월하는 장점이 있고, 이야기 전개 과정에서 느끼게 되는 예술적 체험은 비교하기 힘든 잔상을 남긴다. 캐나다의 ‘태양의 서커스’, 뉴욕 오프 브로드웨이의 실험극인 ‘블루맨’이나 ‘스톰프’, 아르헨티나 암벽 등반가와 예술가들이 만든 ‘델 라 구아다’ 혹은 ‘푸에르짜부르타’ 등이 대표적인 글로벌 흥행작들이다.

대한민국 공연가에 첫 도전장을 내민 ‘무사’는 우선 규모나 볼거리에서 기존의 작품들을 압도한다. 반달 모양으로 길고 시원스럽게 펼쳐진 열린 무대는 기존의 프로시니엄 아치 너머로 보던 공연에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입체감을 선사한다. 아찔할 정도로 날카롭게 치솟은 경사면을 바라보면 어떻게 배우들의 등장과 퇴장이 전개될까 아리송해지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기우에 불과함을 깨닫게 된다. 하늘로 열리고 땅으로 꺼지는 무대 변환이 시종일관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중으로 회전하는 ‘명성황후’의 턴테이블 무대나 단지동맹을 하는 울창한 자작나무숲이 등장하는 안중근 소재의 뮤지컬 ‘영웅’의 무대를 디자인했던 박동우 교수가 작심하고 만든 느낌이다. 왕성한 활동을 통해 여러 작품에서 다양한 이미지를 선보인 정재진 영상 디자이너가 빚어낸 이미지들과 충돌하며 조화를 이루는 무대의 비주얼은 차라리 황홀하다.

시공을 초월하는 캐릭터들의 이미지도 흥미롭다. 역사극처럼 출발하지만, 이야기는 판타지를 품으며 전개된다. 고전소설 ‘박씨 부인전’에서 이미지를 차용한 천둥이나 박처사도 흥미롭고, 그런 천둥을 호위하는 계화와 계월의 이미지나 인간 영웅 이시백을 보좌하는 범총천과 홍대권의 모습도 마치 무협 영화 속 근사한 무사 캐릭터처럼 상상을 자극하는 재미를 선보인다. 해외 시장으로의 진출을 염두에 둔 듯, 다양한 아시아권의 신화들을 활용한 아이디어도 흥미롭다. 중국의 대표적인 신화집인 ‘산해경’에서 모티브를 따온 마신 우사첩이나 울루가 대표적이다. 무속 신화 속 이미지들도 여럿 눈에 띄는데, 제주도의 무당굿인 ‘이공본풀이’에서 가져온 한락궁이나 ‘천지왕본풀이’에서 빌려온 수명장자 혹은 ‘차사본풀이’에서 차용해온 저승사자가 그런 사례들이다. 마치 ‘반지의 제왕’이나 ‘왕좌의 게임’을 떠올릴 만큼 다양한 신화 속 이미지들이 적절히 얽혀지고 격돌한다. 넋 놓고 바라보는 어린 관객들의 반짝이던 눈망울이 꽤나 인상적인 잔상을 남긴다.

17억여 원의 예산과 48명의 출연진, 총 100여 명에 달하는 제작진은 이 작품의 규모를 알려주는 외형적 수치들이다. 블록버스터 뮤지컬의 제작비가 수십억 원을 훌쩍 넘기는 요즘 공연계의 현실과 견주어보면 적은 예산에 다양한 시도가 돋보인 사례라 인정할 만하다. 무엇보다 큰 성과는 우리도 도전하면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일 것 같다.

초연이라 눈에 띄는 문제는 있다. 예를 들어, 프롤로그 격인 내레이션이나 극의 초반 다소 복잡한 설정이 그렇다. 아무래도 기존의 역사나 잘 알려진 전설 대신, 마치 컴퓨터 게임을 시작하는 것처럼 이야기 배경을 설명하는 방식이 너무 직설적이고 불친절한 탓이다. 막과 막을 잇는 전환을 마치 게임 속 새로운 스테이지처럼 구성한 것도 마찬가지다. 게임이 익숙한 젊은 세대들에겐 흥미롭겠지만, 가족 단위의 중장년층 관객들에겐 아무래도 낯선 풍경이다. 특히, 공연의 호흡이라는 면을 감안하면 이야기 전개가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 공연을 이어가며 고민해 봐야 할 과제다.

‘무사’의 가장 큰 미덕은 과감한 도전과 실험 정신이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주인이 챙기는 작금의 대한민국 공연계에서 절실한 목마름의 대상은 당연히 완성도 높은 창작물의 등장이다. 소위 ‘킬러 콘텐츠’ 발굴이다. ‘무사’의 행보가 박수 받아 마땅한 가장 큰 이유다. ‘무사’의 성장뿐 아니라 제2, 제3의 ‘무사’를 기대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오늘만큼이나 내일이 궁금하다. 그래도 뿌듯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심정은 아닐 것 같다. 응원과 격려의 기립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