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이 강독 대신 보여 주신 스크린 화면의 ‘현대판 장발장’이란 제목이 몇 날이 지난 지금도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인천의 한 마트에서 일어난 사건, 젊은 아버지가 10대로 보이는 아들의 배낭에 우유와 사과 몇 알을 넣고 있었다. CCTV에 그 장면이 잡혔고 신고받은 경찰의 등장으로 경위가 밝혀졌다.

아버지는 기초 생활 수급자, 집에는 어린 아들이 하나 더 있단다. 세 가족이 아침밥, 점심도 먹지 못했으니 누구라도 이성적 판단은 뒤로 밀렸을 것이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야 체념이라도 하겠지만 쌓여 있는 먹거리들 앞에서야…. ‘레 미제라블’의 재판(再版)이 200년이 흐른 한국땅에서 벌어진 것이다.

다른 점이라면 장소가 파리의 빈민가에서 화려한 인천의 마트로, 발견 장면은 사람의 눈이 아닌 CCTV란 현대 문명의 기계다. 훔친 먹거리도 빵에서 우유와 사과로 달라졌으며 현대판에서는 어린 공모자가 있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장발장은 빵 한 조각으로 19년의 형을 살았다. 한국의 현대판은 마트 주인의 용서. 현장 조사를 나온 경찰은 형무소 대신, 주린 부자를 식당으로 데려가 국밥을 사줬다. 옆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먹는 일에만 정신이 팔린 부자의 모습을 보면서 호주머니 속의 돈을 꺼내 정을 베푸는 경찰 때문에 코끝이 시큰했다. 더 감동적인 장면은 허겁지겁 국밥을 먹고 있는 그들 곁으로 한 사람이 봉투를 전해주고 그냥 되돌아나가는 화면이었다. 이름도 말하지 않은 그가 건넨 봉투에는 20만 원이 들어있었다 한다. 감동 위에 감동이 겹쳤다.

살아가는데 간난(艱難)이 한 두 가지뿐이랴! 이 간난을 이겨냈을 때 보람을 느낀다. 무엇이 어렵고 어렵다 하더라도 배고픔처럼 견뎌내기 힘든 일은 없지 싶다. 지조도 정의도 의리도 그 배고픔 때문에 훼절한 사람이 많다. 나라가 국난을 겪을 때 더 그렇다.

조선 광해군 때의 한 선비의 아내가 남편의 친구들에게 수제비라도 끓여 대접하려고 식칼로 궤짝을 쪼개다가 잘못하여 젖가슴을 찍고 말았다. 비명에 사실을 알게 되고 주인 선비가 ‘가난이 죄’라고 한탄하자 한 친구는 그 선비와 발길을 끊어버렸다. 가난이 원수인 줄 이제야 알았냐며….

선비는 마음을 바꿔 벼슬길에 나갔다가 인조반정 때 죄인으로 몰려 죽게 되었다. 형장으로 끌려가는 길에 발길을 끊어버린 옛 친구가 술과 안주를 가지고 찾아왔다. 끌러가던 선비가 찾아온 친구에게 말하기를 “소인기(少忍飢 : 조금만 배고픔을 참아라) 소인기 소인기 하라” 했단다. 조지훈의 ‘지조론’에 나오는 얘기다. 나중에 통절히 깨달은들 후회는 소용이 없다.

‘소인기’와 관련하여 조양숙 씨가 ‘논어강설’(제1편 270)’에 조선 중기 때의 권신 이이첨(李爾瞻)과 ‘소인기’의 유래를 소개해 놓았다.

이이첨은 명문대가의 후손이었으나 젊은 시절은 무척 가난했던 모양이다. 어느 날 아내가 벽지의 풀기가 붙은 벽의 흙을 긁어먹는 장면을 목격하고 절치부심 노력하여 선조 15년 생진과를 통해 광릉참봉 말직을 얻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릉의 세조 능의 위패를 지켜 선조를 감동시켰다. 그 뒤 별시문과, 문과중시 장원하고 세자 광해군을 가르쳤다. 영창대군의 탄생 이후 영의정인 소북의 유영경과 대립하다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반대파인 유영경 등을 숙청하고 대북의 영수로 부귀영화를 누렸다.

10년을 재상으로 있으면서도 악착같이 재물을 모았다. 가난 시절의 한풀이가 잘못된 것이다. 끝내는 역적으로 몰려 비참한 최후를 맞아 죽음 직전에 친지들에게 ‘소인기’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한다.

영원한 권력, 영원한 영광은 없다. 사노라면 모든 것은 변한다. 하늘은 끝내 공평하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 저지른 일이라도 훔치는 것에 손뼉 칠 수는 없다. 그러나 순간의 잘못으로 저지른 죄에 함부로 붉은 낙인을 찍어서도 안 된다. 용서받을 잘못은 누구에게나 있다. 너도 잘못하고 나도 잘못하며 살아간다.

‘현대판 장발장’ 경찰관과 익명의 기부자, 그들이 가진 것이 많아서 남에게 베푸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이 넘치는 성탄, 훈기가 가득한 세모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