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겨울 청주교도소. 아내가 보내온 편지.

“나는 민주주의, 정의, 평화, 민족을 위해 살려고 노력했다. 중용의 철학 속에 일관된 인생을 살자고 늘 자신에게 다짐했다. 나는 내게 닥친 다섯 번 죽음의 고비, 6년 동안의 옥중 생활, 수십 년 간의 감시와 연금, 망명 생활을 극복했다. 나는 모든 고난의 순간마다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것은 내가 살아있음의 확인이었다. 그래도 어찌 흔들리지 않았겠는가. 내 고난에 동참하여 나를 일으켜 준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들이 진정 고맙다.”(‘김대중 자서전 2’ 중에서)



한 사람의 삶이 한 시대의 역사인 경우가 있다. 바로 ‘인동초’ 김대중의 삶이 그렇다. 남도의 외딴 섬에서 태어나 세계인의 애도 가운데 눈을 감을 때까지 DJ는 파란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헤쳐 왔다.

일제 강점기에 유년기를 보냈으며 전쟁의 참화를 거쳐 촉망 받는 청년 실업가로 성장했다. 그리고 30여 년에 걸친 군사 정권 시기에는 민주주의를 위해 고통과 인내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그리고 21세기로 건너오는 길목에서는 겨레의 새 길을 여는 15대 대통령으로, 역동적이면서도 드라마틱한 생애를 숨 가쁘게 살아 냈다. 한편의 거대한 장편 서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1924년 1월 6일 무안군(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태어났다. 하의도는 목포에서 34km 떨어진 외딴 섬으로 한반도 서남쪽 끝에 자리한다. ‘하의도 농민 운동’이 일어났던 것은 농토는 적은데 수탈을 하는 협잡꾼들이 많았다는 방증이다.

그의 아호 후광(後廣)은 마을의 지명에서 유래한다. 마을 뒤편 갯벌을 메운 넓은 간척지가 펼쳐져 있어 후광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개간지라 섬이 없던 마을은 물이 귀했던 탓에 어른이 된 후에도 “수도꼭지에서 물이 새면 초조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는 둘째 부인의 장남이었다. 아버지는 첫 부인과 1남 3녀를 뒀으며 둘째 부인과는 3남1녀를 뒀다. 어머니는 큰집에 들어가지 않고 따로 살았기에 삶이 곤궁했다고 한다. 농사를 지으며 마을 구장 직을 맡고 있던 그의 부친은 예인 기질이 농후한 분이었다. 다정다감하고 정에 약했지만 일본에 대해서는 독한 말을 곧잘 할 만큼 의협심이 남달랐다.

자식에 욕심이 많았던 어머니는 특히 장남이었던 그에게 헌신적이었다. 어머니는 “대중이가 공부를 곧잘 하니 여기서 썩히지 말고 목포로 가자”고 설득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남다른 교육열과 애정이 인간 김대중을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자서전에서 “앞을 내다보는 어머니의 혜안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나도 없었을 것”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는 평생 작은 댁으로 사셨던 어머니의 명예를 지켜드리기 위해 정치를 하는 동안 자신의 출생과 어머니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소년 김대중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목포공립상업학교(목포상고로 바뀐 후 전남제일고로 바뀜)에 수석으로 입학한다. 목포는 김대중을 기르고 품었던 어머니의 자궁 같은 곳이다. 원대한 꿈을 품은 청년에서,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정치인으로, 나아가 한반도 통일과 세계 평화를 염원하는 글로벌한 지도자로 성장한 데 목포가 큰 힘이 됐다. ‘목포는 항구다’는 말은 ‘목포는 김대중이다’라는 의미와도 상통된다. 그는 목포에서 꿈을 키우고 미래를 개척해나갔다.

“내가 목포상업학교에 다닐 때, 우리 집은 임진왜란 당시 이 충무공이 진을 쳤던 목포대(木浦臺) 안에 있었다… 당시 목포부(木浦府)가 목포대 일대를 개발하려 했던 것 같다. 뜻밖에 나는 파헤쳐진 성터에서 조선 수군들이 사용했던 숟가락이나 밥그릇 같은 식기류가 출토되는 것을 보았다. ‘조선 수군들이 여기서 숙식을 하고 나처럼 저 목포 앞바다를 응시하며 나라를 지켰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자 가슴이 뭉클했다. 왜적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은 나라 잃은 일제 시대 당연히 민족의 영웅이었다.”(‘김대중 자서전’(삼인) 중에서)

아마도 청년기 시절의 그의 심중에는 충무공의 나라 사랑과도 같은 열정이 깃들어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 나라사랑은 이난영의 노래 ‘목포의 눈물’에 투영돼 있는 정신과도 상통할 거였다.

학창시절과 젊은 시절 아니 일생을 통해 그는 늘 책을 가까이 했다. 독서광인데다 영어, 작문, 역사 성적도 출중했으며 웅변에도 탁월한 소질이 있었다. 고교 학적부에는 “언변은 늘 정확, 명료하다”라고 기재돼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고교 졸업 후엔 목포상선회사에 입사해 경력을 쌓았으며 이후 동양해운이라는 회사를 차리고 해운업을 시작한다. 1948년에는 목포일보를 인수해 1950년까지 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후 그의 삶은 정치 쪽으로 선회를 한다. 그러나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만큼이나 정치 여정 또한 곡절이 많았다. 1954년 민의원에 출마한 후 세 번 연거푸 낙선한다. 우여곡절 끝에 네 번째 당선되었으나 군사 쿠데타로 의정 활동이 막히게 된다.

이후의 여정은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대로다. 1971년 40대 대선 주자로 나서 박정희와 경쟁을 했다. 그 대가로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특히 1980년 12·12 군사 반란으로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김대중을 내란음모사건 주모자로 조작한다. 당시 김대중은 “이 땅의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 정치보복이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해달라”라고 법정 최후 진술을 했고 이는 국제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연금과 사형 선고, 망명, 연금으로 이어지는 가시밭길도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평화에 대한 염원을 막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네 번의 도전 끝에 대통령에 당선되기에 이른다.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IMF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동분서주해가며 파산 직전의 나라를 구한다. 많은 이들의 표현대로 “그는 민족 성원들의 운명을 가둔 분단 체제의 철옹성 앞에 가장 창조적이고 대담한 도전자”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늘 민주주의의 달성을 위해 항거하는 민중의 곁에 있었고 그의 시선은 힘 가진 위정자쪽을 향해 매섭게 버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의 삶은 세상을 바꾸는 데 지향을 두었다. 자신의 노력이 당대에 평가 받지 못한다 해도 역사가 평가하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정치를 심산유곡에 핀 순결한 백합화가 아니라 흙탕물 속에 피어나는 연꽃 같은 것이라 여겼다. 악을 보고 행동하지 않는 은둔과 침묵은 기만이고 위선이다. 내가 훌륭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정치인으로 살아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늘 길 위에 있었기에 고단했지만 내 자신과 적당히 타협하지 않았고 게으름을 경계했다. 지식의 정점에 서 있는 철학자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인류를 위해 몸 바쳐 노력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사진제공=목포시·신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