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군 관산읍 천관산 자락에 위치한 장흥 위씨 재실 장천재(長川齋·전남도 유형문화재 72호). 존재 위백규 선생은 17살(1743년)부터 이곳에서 독서하며 문중 자제들을 대상으로 강학(講學)했다. 40살 이후에는 다산정사(茶山精舍)에서 교육활동을 이어갔다. 우연하게도 정약용의 ‘다산초당’과 이름이 같다.

올해 ‘존재의 날’(5월 15일)에 열린 ‘존재학 학술대회’.

존재 위백규(1727~1798) 선생은 과거를 거쳐 출사(出仕·벼슬을 해 관직에 나아감)하는 대신 향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교육을 하고, 90여권의 책을 썼다. 사는 지역이 궁벽하고(地壁), 성벽이 궁벽하고(性壁), 사람이 궁벽한(人壁) ‘삼벽’(三壁) 콤플렉스 속에서도 가슴에 경국제민(經國濟民)의 뜻을 품고, 국가제도와 문학, 세계지리, 우주로 눈을 돌렸다. 200여년전 존재가 문제제기를 했던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는 현재에도 진행형이다. 우리가 ‘존재학’(學)을 더욱 깊이 연구하고, 알아야 하는 이유다. 이번 회에서는 존재의 문학세계와 실학사상에 대해 살펴본다.



“도롱이에 호미를 걸고 뿔이 굽은 검은 소를 몰고/ 고동풀을 뜯어먹게 하며 깃물가로 내려갈 때/ 어디서 품진 벗님은 함께 가자 하는가.”

존재가 46세(1772년)에 지은 ‘농가 9장’(農歌九章) 가운데 두 번째 시 ‘밭을 갈다(適田)’이다. 아침에 농기구를 챙겨 소를 몰고 집을 나서서 밭을 갈고, 보리밥 한사발과 콩잎 나물 반찬으로 새참을 먹고, 저녁에 귀가하기 까지 농번기의 하루와 가을 수확의 즐거움을 9개의 연시조로 묘사했다. 특히 농사짓는 모습을 멀리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땀을 흘리며 논밭에서 일을 하며 느낀바를 한글로 지은 작품이다. 지난 2003년 대학 수능시험에 ‘농가 9장’ 4~6장이 출제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농가9장’ 작품에 대해 조동일 서울대 명예교수는 ‘한국 문학통사’에서 “사대부 전원(田園) 시조의 결정적 면모를 마련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장흥 출신 한승원 작가는 “…존재 위백규의 시는 도회에서 살다가 잠깐 전원적인 삶을 둘러보려고 찾아온, 그래서 물위에 뜬 기름같은 손님의 시가 아니다. 고산 윤선도나 송강 정철 같은 분의 자연을 완상하고 도락을 즐기는 시들과도 같지않다”(‘시방 여그가 그 꽃자리여’ 장천재 동백꽃 중)고 평했다.

존재가 남긴 시는 200여편 400여수. ‘농가9장’ 외에도 보리 농사 연작시인 ‘죄대’(罪麥)·‘맥대’(麥對)·‘청맥행’(靑麥行), 자연재해를 원망하고 관리들의 횡포를 고발하는 ‘연년행’(年年行) 연작과 회갑을 맞아 부모를 추모하는 장편가사 ‘자회가’(自悔歌) 등이 알려져 있다.

김석회 인하대 명예교수는 ‘자회가’에 대해 “노인의 삶을 이 정도로 탁월하게 묘파해 형상화 하고 있는 작품은 최근 박완서의 단편을 제외하고는 한국 문학사상 그 유래가 없어 보인다”고 격찬했다. 특히 존재의 어휘 구사를 “한문의 구기(口氣)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감각적인 일상 어구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함으로 말미암아 사대부의 작품으로 여기기 않을 만큼 평이하고 진솔한 느낌을 준다”고 높이 평가했다.

언론계를 떠난 후 존재학 연구소를 운영하는 6대손 위정철(79)씨는 “존재공의 문학세계는 넓다. 당시 사람들이 군왕을 대상으로 연군(戀君)의 글을 쓸 때 존재공은 농촌현장의 글을 썼다. 다산(정약용)시가 딱딱한데 비해 존재 시는 유연하고, 감칠맛이 있다. 다산이 한문으로만 시를 썼지만 존재는 한글로도 ‘농가 9장’ 같은 시를 썼다”고 말했다.

존재의 생애는 크게 ▲태어나서 24세까지 자수면업기(自修勉業期) ▲25~40세까지 덕산수학기(德山修學期) ▲41~54세 까지 궁경독서기(躬耕讀書期) ▲55~71세까지 강학저술기(講學著述期) ▲71~72세 까지 사환와병기(仕宦臥病期) 등 5단계로 구분한다.

존재는 과거를 통한 출사의 뜻을 접고 41세(1767년)부터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사강회(社講會) 활동을 펼친다. 논밭에서 파종하고 김을 매는 ‘경’(耕)과 농사틈틈이 공부하는 독(讀)을 병행하는 것이다. 사강회는 1790년대에 ‘무기계’(‘남을 해치지 말자’는 의미)로 바뀌어 현재까지 마을에 이어지고 있다.

존재는 종종 다산 정약용과 오버랩된다. 존재는 1727년생, 다산은 1762년생으로 한 세대, 정확히 35년 앞선다. 존재가 세상을 떠난 지 3년후인 1801년에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를 왔기 때문에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존재가 정조에게 올린 개혁안 ‘만언봉사’(萬言封事)를 다산이 읽어봤을 가능성은 있다. 다산의 500여권 저술 가운데 존재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문학과 경학(經學·유교 경서를 연구하는 학문), 경세학(經世學·정치적 실천을 핵심으로 하는 학문) 등 상당한 부분에서 공통점 또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격물설’(格物說) 등을 쓴 존재는 스스로 성리학자라고 생각했다. 또 평생 교육자였고, 90여권의 저술을 남긴 사상가였고, 중농(重農)주의적 실학자였다. ‘정현신보’(政鉉新譜)와 ’만언봉사‘(萬言封事)를 통해 조선 사회의 각종 폐단을 개혁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제시했다. 이처럼 18세기에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존재의 학문은 다산의 명성에 가려져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학계에서도 경학이나 경세학 보다 문학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존재는 경학과 경세학, 문학, 역사·지리 등 90여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이 가운데 24권이 정조의 명으로 궁궐에 올라가는 등 60여권은 유실된 상태다. 나머지 30여권을 종손자 다암 위영복이 1875년에 ‘존재집’(24권 12책)으로 엮었다. 이를 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와 한국 고전문화연구원이 한글로 번역한 때는 존재가 타계한지 215년이 지난 2013년 6월이다. 문중에서는 독립된 ‘존재 기념관’ 건립을 절실히 바라고 있다.

지난 2010년에 ‘존재 위백규와 다산 정약용의 생애와 사상연구’를 펴낸 위정철씨는 ‘나가는 말’에서 “존재의 문학세계, 우주론을 비롯한 철학, 국부민안(國富民安)을 위한 경국관 등 어느 것도 실상만큼 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존재가 조명을 받지 못한 이유로 ‘선생이 중앙의 주류사회의 흐름에서 멀리 비켜나 있었기 때문’이라고 봤다. 궁벽한 지역에서 일생을 보내면서 학문을 이어갈 제자를 배출하지 못했고, 당대의 지식인들과 교류를 하지 않았고, 다산의 명성에 가려진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

우리가 250여년전 존재의 학문과 사상을 살펴봐야 하는 까닭은 뭘까? 김석회 교수는 지난 2003년 장흥문화원 주최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존재 위백규의 스펙트럼’ 논문에서 “우리가 18세기 향촌사회·향촌문화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존재 선생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존재 선생의 삶과 문학은 보는 자가 보고자 하는 만큼만 그 실체를 드러내는 저 천고명승(千古名勝) 천관산과도 같은 신비한 존재다”고 묘사했다.

존재 역시 생전에 자신의 저술을 후대에서 어떻게 평가할까 염려하며 이렇게 탄식한 바 있다.

“만약 후세에 양자운이 나와서 천년 뒤에라도 인정해 준다면 나에게는 아침저녁 사이에 만나는 것과 같을 것이다.”(1837년 송치규가 쓴 ‘행장’중)

양자운은 전한(前漢) 때의 학자 양웅의 자로, 자신이 지은 ‘태현경’에 대해 사람들이 “이처럼 어려운 글을 누가 읽겠는가?”하자 “나는 후세의 자운을 기다린다”고 답했다. 존재가 바란 ‘후세의 양자운’은 아직 안 나타났을까? ‘존재학’(學)은 여전히 가공되지 않은 보석 상태이다.

한편 장흥군과 존재기념사업회는 존재 위백규 선생의 동상을 새로 제작하고 있다. 1985년께 세워진 존재 입상은 시멘트로 제작돼 군과 문중에서 기금을 모아 책을 든 유학자 좌상으로 만들고 있다.

/송기동 기자 song@kwangju.co.kr

/장흥=김용기 기자 kykim@kwangju.co.kr

/사진=장흥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