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재가 그린 ‘동국여지지도’.

해남윤씨 고택 녹우당.

고산 윤선도 유물 전시관.

언급한 대로 공재 윤두서는 고산(孤山) 윤선도의 증손이다. 공재(恭齋)를 알기 위해서는 윤선도를 알아야 한다.

◇시조의 대가, 공재의 증조부 윤선도

잠시 고산이라는 인물을 되짚어보자. 그는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시조시인이다. 그는 우리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던 천상 문인이다. 정철, 박인로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가인으로 꼽히는데, 유려한 문체와 고아한 언어의 활용은 여느 문인과 구별된다. ‘어부사시사’, ‘오우가’는 그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다. 특히 그의 작품을 엮은 대표시문집 ‘고산유고’는 국문학사상 최고의 시조집이라는 평가가 따른다.

고산의 뛰어난 문학작품, 달리 말해 개성적이며 독특한 문학은 타협할 줄 몰랐던 그의 성정에서 비롯됐다. 고유한 특질이 남다른 문학작품을 만드는데 기여를 했지만, 아쉽게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불편함으로 작용했던 모양이다. 결국 고산의 타고난 강직함은 정계에 있는 동안 줄곧 파열음을 냈다.

고산은 광해군이 보위에 오르고 이를 보좌했던 이들이 경거망동하자 상소를 올린다. 그러나 돌아온 건 유배라는 시련이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실각하면서 해배(解配)가 되지만 더 이상 정계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이후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인조가 이미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실망한 나머지 제주도로 향한다. 그 길에 보길도를 발견하고 그곳에 ‘자신만의 제국’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 예술적 성취와 노블리스오블리제

녹우당(綠雨堂). 해남윤씨 고택으로 ‘푸른 비가 내리는 집’이라는 뜻이다. 당호가 시적이다. 이름만 들어도 눈앞에 푸른 비가 흩날리는 것 같다. 이곳은 15세기 중엽 윤선도의 4대조부인 효정이 터를 정하면서 지은 건물이다. 녹우당 현판은 윤두서의 친구 옥동(玉洞) 이서가 썼다고 전해진다. 이서는 행서와 초서에 발군의 실력을 지녔던 서예가로, 사람들은 그의 필체를 일컬어 ‘옥동체’라고 불렀다.

이곳 사랑채는 효종이 윤선도에게 하사한 수원 집을 옮겨온 것이다. 현종 9년(1668)에 이축한 사랑채 뒤로는 안채가 자리한다.

녹우당을 일별하고 해남윤씨 일가의 유물과 유품이 집결돼 있는 유물전시관으로 향한다. 이곳에는 유물, 고서, 고산유금 등 모두 4600 여 점이 보관돼 있다. 전시관을 둘러보고 나면 해남윤씨 가문과 고산, 공재라는 인물을 다시 보게 된다. 공재가 명문가의 후손이라는 자의식이 남달랐을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윤두서는 어린 시절부터 글씨와 시에 능했다. 선조로부터 재물뿐 아니라 타고난 예술적 재능도 물려받았다. 비록 시대의 불운으로 활발한 정계 활동을 펼치지 못했지만, 그의 내면에는 예술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다.

“뛰어난 경륜을 세상에 펼치려는 열망이 좌절되었을 때 그는 영원히 주저앉은 것이 아니라 은미하게 보신하면서 언젠가 오게 될, 꿈이 이루어질 날을 기다렸다. 자신의 꿈이 당대에 이루어질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꿈을 접지 않았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의 뜻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있으리라는 확신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서화 예술에 사상과 철학, 학문을 대입시키면서 이전 시대에는 없었던 새로운 차원의 예술로 승화시켰다. 바로 이것이 지금까지 윤두서의 회화가 빛나는 이유다.”(박은순, ‘공재 윤두서-조선 후기 선비 그림자의 선구자’, 돌베개, 2010.)

아마도 다음의 시조는 공재의 심중을 대변하는 것 같다. “옥에 흙이 묻어 길가에 버려져 있으니/ 오는 이 가는 이 모두 흙으로만 아는구나/ 두어라 아는 이 있을 것이니/ 흙인 듯 가만히 있거라”

낭중지추(囊中之錐). 그러나 공재의 특출함은 이내 발현된다. 특히 그가 남긴 그림의 소재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유하 백마도’, ‘석류매지도’, ‘노승도’, ‘채과도’ 등은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작품이다. 또한 ‘나물 캐는 여인’, ‘송하납량도’, ‘짚신 삼기’ 등 일상과 풍경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형상화한 그림은 “과연 공재구나”라는 감탄을 하게 한다.

공재는 그림뿐 아니라 지도도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동국여지지도’, ‘일본여도’는 보물(제481-3, 4)로 지정될 정도로 귀한 유물이다. 그가 지도에도 관심이 있었던 것은 실학적 태도와 연관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옛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화풍을 모색했다는 데 있다. 젊은 시절에는 ‘고씨화보’와 ‘당시화보’를 임모(臨摸·글씨나 그림을 베낌)하면서 서화를 배웠다고 한다. 특히 ‘해남윤씨군서목록’에는 중국의 화보, 문집, 이론서 등이 망라돼 있는데, 이를 자신의 학습에 접목했다. 기본기를 탄탄히 다지고 나서는 자신만의 화풍을 정립한다.

그림에 문외한인 이들도 공재의 그림 가운데 말과 인물화에 주목한다. ‘자화상’에서 받는 충격과 경이는 작품이 주는 독특한 아우라에서 비롯됐을 터다. 사물에 대한 심미안과 세미한 관찰력, 이를 구성해내는 묘사력은 공재를 당대의 화가를 넘어 오늘과 내일의 예술가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그러나 공재는 천재성 못지않게 인간적인 면에서도 향기 있는 예술가였다. 지역민들에 대한 구휼은 명문가의 자제가 갖춰야 할 도리를 말해준다. 1713년 낙향 후 기근이 들었던 모양이다. 공재는 집안 소유였던 산의 나무를 베어 소금을 굽게 해 주민들을 도왔다. 또한 이후에는 적잖은 돈이 들어가는 땅을 개간해 주민들의 생활터전을 확보하도록 애썼다.

공재는 노복(老僕·늙은 남자노예)을, 요즘 말로 표현하면 ‘인격적으로’ 대하는 게 가문을 보전하는 방도라고 생각했다. 예술 이전에 그는 먼저 사람이 되고자 했다. 다음은 박은순의 ‘공재 윤두서-조선 후기 선비그림의 선구자’에 수록된 내용이다.

“도연명이 아이에게 노비 한 사람을 주면서 경계하여 이르기를 이 또한 사람의 자식이니 잘 대우하라고 했다. 세상 사람들이 이 뜻을 모르는 이가 많아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노비를 재물로 본다. 채찍질하고 포악하게 대하여 소나 말보다 못하게 대한다.… 얼고 굶주리게 하고, 해치고 상처 내어 살아서는 그 집안을 파괴하고, 죽어서는 그 재산을 몰수하는데 슬프구나. 나는 이러한 까닭에 이 기록을 남겨 잘 대우하라고 하였다. 이로써 스스로를 경계하여 반성하고, 또한 자손에게 주려고 하는 것이다. 병술년 4월 11일에 공재 주인 쓰다.”(윤두서의 ‘선우록제사’ 중에서)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