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치 매화도 1,2

진도 첨찰산 남쪽자락에 들어앉은 운림산방(雲林山房·국가명승 제80호)은 조선 후기 남종화의 대가인 소치 허련의 화실 당호이다. ‘소허암’(小許庵) 또는 ‘운림각’(雲林閣)이라고도 한다. 소치의 뒤를 이어 2대 미산 허형-3대 남농 허건과 임인 허림-4대 임전 허문-5대 허청규·허진·허재·허준 등 200여 년 동안 9명의 예술가를 배출한 남종화 화맥(畵脈)의 산실이기도 하다. 이처럼 일가직계(一家直系) 5대째 예술 혼이 이어지는 사례는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도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증조부(소치 허련)는 자수성가한 분입니다. 자기가 찾아가서 초의선사에게 학문을 익혔고, 완당(김정희) 선생에게 글을 익혔습니다. 그림은 중국풍에서 벗어나서 허련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해 후세에 남는 작가가 됐습니다.”

소치 허련의 증손자인 임전(林田) 허문(77) 화백은 증조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 집안에서 5대를 이어 200년 동안 화맥을 이어가는 위업은 진도에 뿌리를 내린 양천 허씨 예술 명문가의 조선 후기부터 근·현대까지 이어지는 드라마틱한 가족사이면서 한권의 ‘한국 회화사’다.

소치 허련은 슬하에 4남을 뒀다. 그중 맏아들인 허은(1831~1865)이 그림에 소질을 보였다. 그러나 35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때 소치는 아들을 여의고 몹시 상심했다고 한다.

대신 막내아들인 허형(1862~1938)에게서 천부적인 그림 재능을 발견한다. 16살(1877년) 때에 비로소 그림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요절한 맏형의 미산(米山)이라는 호를 물려주었다. 그래서 맏형 허은을 ‘대(大)미산’, ‘선(先)미산’, 허형을 ‘소(小)미산’이라고도 한다. 62살(1923년) 나이에 제2회 조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해 입선하는 등 실력을 인정받았다. 미산은 아버지(소치)처럼 초의선사나 추사 같은 대스승을 만나지 못했다. 그렇지만 미산은 가난한 생활속에서도 전문 직업화가로서 꾸준히 작품활동을 펼쳐 가문의 대화맥을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

미산은 다섯 아들을 뒀다. 그중 넷째아들인 남농(南農) 허건(1908~1987)은 남종 회화예술을 현대적 감각으로 승화시켜 남농 특유의 ‘신남화’(新南畵)라는 새로운 화풍을 일궈냈다. 고향의 산과 들, 바닷가 마을, 산사 등 향토적인 풍경을 ‘갈필법’(渴筆法)을 사용해 그렸다. 갈필법은 소치가 많이 사용한 가문의 필법으로, 물기가 거의 없는 붓에 먹을 조금 묻혀 마른 붓질을 하듯 그리는 기법이다.

“붓으로 그린 것 같지 않고 작대기로 그린 것처럼 선이 강하고, 필력이 있어요. 그래서 ‘작대기 필법’이라고도 합니다.”

임전 허문 화백의 설명이다. 자신역시 초필(밑그림)로 구도 잡을 때 소치의 갈필법을 사용한다고 한다. 남농은 37살(1944년)때 제23회 조선전람회에 출품한 ‘목포의 일우’로 최고상을 수상했다. 75살(1982년)때 대한민국 문화훈장 ‘은관장’을 받았으며, 같은 해에 운림산방을 복원해 국가에 헌납했다. 문하에 많은 제자를 양성해 한국 화단에 남종회화의 큰 산맥을 이뤘다. 소치의 종고손(從高孫)인 의재(毅齋) 허백련(1891∼1977)도 미산과 남농으로부터 그림을 익혔다.

“남농만이 하는 신남화를 개척해 일세를 풍미했습니다. 100년을 전후해서 남농을 따라갈 화가는 없습니다.”(임전 허문)

미산의 막내아들(5남)이자 남농의 동생인 임인(林人) 허림(1917~1942)은 18살(1935년) 제14회 조선전람회에 처음 출품한 후 19회까지 연속 6회 입선하면서 타고난 재능을 드러내면서 형 남농과 함께 ‘형제 화가’로 널리 알려졌다. 부친(미산)이 세상을 떠난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모든 물상을 점으로 표현하는 ‘토점화’(土點畵)라는 독창적인 화법을 선보였다. 토점화는 두텁게 배접한 화선지에 밑그림을 바탕으로 황토로 점을 찍어 그림을 그린다음 그 위에 다시 색을 칠해 완성시키는 점묘 기법이다. 1941년과 1942년 연속 일본 문부성전에 입선해 일본화단에 조선인 화가의 천재성을 드높였다. 그러나 유학생활의 과로로 26살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임인의 예술 혼은 외아들 4대 임전 허문을 통해 피어났다. 불과 생후 11개월 때 선친을 여윈 임전은 큰아버지 남농 슬하에서 자라며 그림 수업을 받았다. 이어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가문의 갈필법을 연구하면서 구름과 안개를 주제로 한 ‘운무 산수화’(雲霧 山水畵)라는 독창적인 화풍을 일궈냈다. 그래서 ‘구름과 안개의 화가’로 불린다. 지난 2014년에 ‘붓집 오십년-이제는 유네스코로’ 회고전과 함께 ‘운림산방 4대(代)전’을 개최한 바 있다.

“소치 갈필법을 써서 초필(밑그림) 구도를 잡고, 그 다음에 배추를 절여 김치를 담그는 식으로 내 나름의 분위기를 만들어 나갑니다.”

5대는 남농의 손자인 허진(56) 전남대 미대 교수와 허재(45), 허준(42), 그리고 허청규(56) 화백이 예술 혼을 잇고 있다. 소치 전시관내 전시된 소치와 미산, 남농, 임인, 임전 등 세대별 작품들을 돌아보면 각기 개성적인 화풍의 차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임전 허문 화백은 현재 운림산방내 명예 관장을 맡고 있다. 서울에 거주하고 있지만 단체 특강요청이 있으면 운림산방을 찾아 5대째 화맥을 이어가는 소치가문의 예술 혼을 강연한다. 그러나 타 지역에서 공무원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다보면 아쉬움이 크다. 진도 운림산방을 아는 이들이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년전부터 운림산방을 ‘유네스코(UNESCO)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하자는 주장을 펴고 있다. 진도군과 전남도가 적극 발 벗고 나서 국가적인 차원에서 추진하자는 것이다. 핵심은 200년 전통으로 5대에 걸쳐 이어져온 화맥이다.

“(운림산방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다면 한국의 운림산방이 세계의 운림산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 세계에서 그림에 관심 있는 사람이 진도를 찾아오게 됩니다. 그런 차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일본은 ‘악령의 섬’이라 불린 군함도(하시마섬)를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중앙정부에서 국가적 차원에서 나서야 합니다.”

/송기동 기자 song@kwangju.co.kr

/박현영 기자 h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