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소박한 차림이다. 걸쭉한 두유 한그릇에 설탕, 소금이 전부다. 소금이나 설탕을 굳이 넣지 않아도 고소한 맛이 입안에 고인다. 후루룩 한 사발을 먹으니 배도 든든하고 시원하기 그지 없다.

광주시 동구 산수 오거리에서 무등산 올라가는 길 초입에 자리한 ‘무공해 두유집’은 팔순이 넘은 노부부가 운영하는 곳이다. 오동환(86) 공노희(80) 부부가 지금 이 자리에 문을 연 게 1971년이니 올해로 45년이 됐다.

인터뷰가 끝나고, 두유도 마시고 사진 촬영을 하려니 할머니가 말했다. “집이 하도 넓어서 사진 찍기 곤란하제.” 할머니 농담에 한바탕 웃음이 일었다. 가게는 두 사람이 생활하는 방과 창고로 쓰는 방 등을 다 합쳐도 채 20평이 안된다.

가게는 지난해 전국 방송을 타면서 화제가 됐었다. 사진 촬영을 위해 예쁜 옷을 입어야 한다며 옷을 갈아 입고 ‘구찌 베니’도 바른 할머니는 “지난해 병원 신세도 질 정도로 힘이 들었다”고 했다. 지금 가게에서 파는 건 두유 딱 한 가지다. 가격대는 3000원, 3500원, 4000원. 차갑게, 또는 따뜻하게 주문해 먹을 수 있다.



부부는 장성에서 꿀벌을 키우다 실패한 후 광주로 올라왔다. 어느 날 할아버지에게 의사가 말했다. “술·담배를 끊지 않으면 5년 내 중풍으로 쓰러진다.” 술과 담배를 참고, 콩을 갈아 하루 한차례씩 먹었다. 당시 할머니는 붕어빵을 팔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콩물을 한 번 팔아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지금처럼 도로가 개설되지 않은 터라, 걸어서 무등산을 찾는 이들이 많던 시절이었다. 첫날 두유 한 그릇을 100원에 내놓았다.

“등산 다니던 손님이 가격이 부담스럽다고 하더라고. 막걸리 한 사발이 30원이던 시절이니까 부담 없이 먹으려면 50원 정도가 좋겠다고 하더만. 그렇지 않아도 두유가 너무 걸쭉한 감이 있었는데 물을 좀 더 넣고 50원에 팔기 시작했제.”

지금도 쌩쌩히 돌아가고 있는 맷돌은 40년이 됐다. 얼음장사에게 당시로는 거금인 3만5000원을 주고 구입한 것이다. “요런 효자가 없어. 우리 가족 먹여 살린 맷돌이제. 요즘엔 요런 맷돌이 없당께.”

진하고 고소한 두유로 입소문이 나면서 가게는 장사진을 이뤘다. 당시에는 먹을거리가 풍족하지 않은 시절이라 인기가 많았다. 두 사람은 번갈아 잠을 자며 거의 24시간 두유를 만들었다. 가게 앞에 자전거 30∼40대가 빼곡이 세워져 있고는 했다. 한 대가 빠지면 한 대가 들어왔다. 1월1일이면 해돋이 등산객들로 가게가 붐볐고 한여름엔 오전이면 두유가 모두 동났다.

당시 최고 단골은 택시 운전사들이었다. ‘보약’이라고 말하며 밥도 날마다 묵듯이 이것도 날마다 먹어야한다며 한밤중이고, 새벽이고 제집 들듯 드나들었다. 당시에는 새벽까지 일하는 택시 기사들이 마땅히 요기할 곳이 없었다.

“정말 열심히 일했제. 여자는 약해도 엄마는 강한 거여. 우리 아들이 엄마는 흙속의 진주라고 하대. 자신은 엄마 때문에 만들어졌다면서. 군대가면서 그 말을 하는데 찡했제.”

두 사람이 4형제를 키운 가게에서는 두유 판매 뿐 아니라 공중전화 관리, 우표 판매 등도 했다. 어떤 손님은 여기가 ‘작은 기업’이라며 농담도 했다.

“20원 내고 공중전화 쓰던 시절인데 전화 관리 수익이 쏠쏠했어. 한달이면 가스통 3개를 구입할 수 있었제. 공중전화 돈을 빼가는 사람도 있어 관리하는 게 좀 힘들기도 했지만 동사무소 옆에 있어 수입인지도 많이 팔았제. 연말이면 연하장과 우표 판매에 잠을 못잘 정도였어 당시엔 전화가 귀해 편지를 많이들 썼으니까.”

할머니는 4형제 잘 커줬고 손주·손녀 8명을 뒀으니 복이라고 했다.

지금은 예전처럼 등산객이 많지 않고, 도로가 뚫리면서 차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판매가 예전만 못하다. 또 다양한 먹을거리가 등장한 것도 원인이다. 무엇보다 나이가 들면서 일하기가 힘들어 판매에 큰 욕심을 내지 않는다.

기억에 남는 단골이 있다. 수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전거를 타고 와 간경화로 고생하던 아들에게 먹이고 싶다며 항상 두 그릇을 사가던 아버지였다. 어느 날 발길이 끊겼다 오랜만에 다시 찾아 물어보니 몸이 건강해진 아들이 군대에 갔고, 이번에 휴가를 나와 다시 두유를 사러왔다고 했다. 왠지 뿌듯해 지는 순간이었다. 경기도 포천에 사는 한 손님은 일주일에 한 번 광주 부모님을 만나러 올 때면 꼭 들른다. 방송을 보고 부산에서 찾아와 재수하는 아들 먹이고 싶다며 두유를 사간 아버지도 있었다.

콩은 강진 병영에서 가져오는 대두, 일명 메주콩을 쓴다. 새벽 5시면 일어나 콩을 삶고 껍질 채 맷돌에 간다. 콩을 불리는 시간은 조금씩 다르다. 여름에는 6시간, 요즘에는 12시간, 겨울에는 20시간 이상 불린다. 초창기에는 무등산에서 약수를 길러다 썼지만 지금은 이온수기서 뽑아낸 물을 쓴다.

할아버지는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는 낡은 노트를 보여줬다. ‘저희 업소를 찾아주신 분들’ 이라는 이름이 붙은 낡은 장부다. 단골이었던 고서중학교 오채선 교장이 직접 만들어준 것이다. 노트에는 가게를 다녀간 많은 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오병문 전남대 교수 등 낯익은 이름이 보인다. 산을 좋아했던 광주일보 선배의 이름도 적혀 있다. 택배를 보낸 송장도 그대로 붙여둔다. 모든 게 역사다.

신양파크 호텔 칠순 잔치에 참석했던 뽀빠이 이상용도 몇차례 들렀다. 거수경례를 하며 “저 뽀빠이입니다”하던 그는 택시 기사 소개로 찾아왔다고 했다. 노트에 적힌 글은 ‘맛있군요! 또 오죠. 2001. 5.6’ 바로 밑에 글을 남긴 A씨 문구도 재미있다. “내가 뽀빠이 다음이네.”

지금 가게는 예전 모습 그대로다. 가게를 고쳐볼까 싶어 설계를 요청한 적이 있었다.

“손님들이 모두 고치지 말라고 하더라고. 우리가 두유 보고 오지 집 보고 오요. 그 돈 있으면 나 주쇼 하더만. 방송에 출연하며 고생 한 적이 있는데 어떤 손님은 웃으면서 이제 우리만 몰래 먹자고 했어. 처음에 50원하던 두유는 70원, 100원을 거쳐 지금은 3000원이여. 우리가 올린 게 아니라, 손님들이 올려준 거제. 편한 마음으로 먹고 싶다고. 아마도 손님들이 가격 올려준 집은 우리집 뿐일 걸.”

낡은 탁자와 동그란 의자는 40년 전 그대로다. 지금도 사용하는 25년된 독일제 식기 세척기는 125만원에 구입한 것이다. 독일제 세척기가 국내에서 처음 시판될 때였다. 지난해 딱 하나 바꾼 게 있다. 할머니 전용, 등받이 의자다.

“남 보기에는 이게 쉬워보이는 데 보통 힘든 일이 아니야. 국자로 콩을 맷돌에 계속해서 넣어주며 지켜봐야 하는데 지난해에는 몸이 않좋아 자울자울하다가 의자에서 떨어질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 콩 삶는 게 특히 힘들제. 한 시간 정도 걸리는데 더울 때는 숨도 못 쉬지. 맷돌을 일일이 씻는 것도 일이야. 사이사이 묻어 있는 쿵물을 깨끗이 씻어내야 다음에 또 맛있는 두유를 만들 수 있거든.”

테이크 아웃도 된다. 두유와 물을 3대 1 비율로 섞어 먹으면 딱이다. 할아버지는 김치찌개 만들 때 한 국자 정도 넣으면 옛날 두부맛이 난다고 귀띔해 준다. 가게는 연중무휴다. 062-263-2690.

/김미은기자 mekim@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