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무르익다 못해 손만 대면 그대로 쓰러져 버릴 것만 같다. 가로수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 제 몸무게를 이기지 못한게 오래이고, 길가엔 낙엽이 수북히 깔리고, 일기예보에선 ‘오늘 아침 서울에 첫 눈이 왔다’고 방송하는 11월 중순. 농익을 대로 농익은 만추의 향기에 취할 수 있는 곳. 가을의 막바지엔 이런 곳에 가서 마지막으로 치닫는 올 한해를 조용히 돌아봐도 좋을 듯 싶다.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안현마을(미당 서정주 선생 묘소)일대는 노란 꽃이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다. 석양에 비친 꽃밭은 마치 황금빛 카핏이 깔려 있는 듯 착각마저 일으킨다. 미당 서정주 문학관과 묘소, 질마재 고개, 선운산 도로변 등 일대 4만 5천평(꽃밭 조성2만 8천평)이 지금 국화로 뒤덮여 있다. 꽃대끝에 달린 꽃망울에선 노란 잎이 활짝 벌어져 벌써 꽃잎을 떨굴 지경이다. 지난달 29일부터 일반인에게 공개 된 국화 꽃밭은 다음달 초까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4월의 선운사 동백꽃, 9월의 공음면 학원농장의 메밀꽃, 선운사 상사화로 이어지는 고창의 꽃잔치를 늦가을 국화가 이어가고 있다.미당 서정주 선생의 생애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리며 말들이 많지만 흐드러지게 피어난 국화꽃들은 아무런 죄가 없다. 고창은 국화와 연관될 만한 게 없었다. 굳이 인연을 찾는다면 고창에서 태어난 미당 서정주 선생이 ‘국화옆에서’ 라는 그 유명한 시를 썼다는 정도이다. 여기에 착안한 정원환(48)미당시문학관 이사장이 미당 선생을 기려 이 일대 5천여평에 지난해 처음으로 국화꽃을 심었다. 올 해에는 22가구의 농가가 국화꽃을 말려 차나 음료을 만들 요량으로 앞다투어 국화를 심으면서 4만5천여평에 국화꽃이 짙어가는 가을마냥 농익은 향기를 피워내고 있다. 이곳에 심어진 국화는 국화중에서 가장 향기가 진하다는 화단국(옥국)으로 3, 4월에 삼목 재배하고 5월중 본밭에 정식하여 꽃을 피웠다. 개화기는 10월 말에서 늦가을 무서리가 올 때까지 개화하는 만생종 품종으로 향이 진하며 꽃이 여러겹으로 되어있고 작아서 용도가 아주 많다. 개화하기 직전에 따서 녹차처럼 덖어서 말리면 국화차나 국화주를 담아서 먹을 수 있고, 만개한 꽃을 따서 끓는 물에 데처서 국화베개로도 사용할 수 있다. 화단국은 국화 품종중 향이 가장 진해 작은 화분 하나만 방안에 놓아도 은은한 향이 계속되므로 직접 키워보아도 좋을 듯하다. 미당시문학관에서 포장도로를 건너 10여분 정도 오르면 미당 묘소다. 묘소에는 미당의 시 ‘선운사 동구’를 새긴 시비가 서 있고, 그 옆으로 미당 내외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고개를 들어 미당시문학관쪽을 보면 소요산 자락에 미당이 자란 진마마을이 눈에 보인다. 지난 2001년에 문을 연 미당시문학관과 그의 생가도 눈에 들어온다. 바람결에 실려오는 국화향기 속에 취하면서 미당 선생 묘소 주변에 펼쳐진 국화밭 산책에 나선다. 어디선가 ‘얼굴백이 황∼소가 ’ ‘그곳이 바로 꿈엔들 잊으리요, 아아아’ 박인수·이동원의 ‘향수’가 맑고 고운 목소리의 합창으로 울려퍼진다. 대전에서 국화밭 구경을 온 50대 중반의 아낙네들이 국화향기에 취하고, 정경에 취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노래를 읊조린다. 이선숙(56·대전시)씨는 “너무 좋아요. 평소 미당 선생의 시를 좋아했는데 이렇게 묘소 인근에 국화꽃이 만발해 있어 시심이 절로 일어난다”고 말했다. 장승한(70·영광군)씨는 “국화 꽃 향기에 취하고, 맑은 가을 하늘에 취하고, 복분자주에 취하니 여기가 바로 별천지가 아니겠냐”고 웃었다. 국화꽃밭을 돌아보는데는 30여분이면 충분하다. 미당 묘소 에서 북쪽으로 바다도 보인다. 변산반도와 고창군 사이에 깃든 곰소만이다. 조성된 국화밭 가운데는 하얀색과 붉은 색 등 색깔이 다른 국화로 만든 나비가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하다. 국화꽃밭 산책을 마치고 행사장 입구로 돌아오면 간이 찻집이 있다. 바로 옆에서는 장작타는 냄새가 국화향기와 어우러져 깊어가는 가을 속으로 침잠시킨다. 따뜻한 국화차 한잔을 음미하면 온몸이 노란 국화꽃과 동화되는 듯한 착각이 든다. 국화는 한의학이나 민간요법에서 널리 활용되어온 영초로 식용, 약용, 관상용으로 이용되어 왔다. 국화차는 두통이나 풍열을 없애주고 청열을 해독하며 생선의 비브리오균을 억제하는 작용도 있다. 이러한 국화차의 효용이 아니더라도 국화밭에서 마시는 국화차 맛은 가을을 마시는 기분이다. 국화축제는 오는 27일까지다. 이번주에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26∼27일 이틀간 국화꽃 따기 체험행사를 경험할 수 있다. 일정량은 행사위원회에 반납하고 일정량은 가져가 국화차를 타 먹을 수도 있다.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고’ ‘ 또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며 ’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 잠도 오지 않았다’는 미당의 시가 국과향과 함께 깊어가는 가을을 배웅하고 있다. /최재호기자 lion@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