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의 서정이 듬뿍 담긴 테마로는 단연 ‘낙엽’을 꼽을 수 있다. 낙엽이 수북이 쌓이고 오색단풍이 흩날리는 숲길에는 만추의 서정이 흠뻑 배어 있다. 고즈넉한 숲길을 걸으며 발끝으로 전해오는 낙엽받는 소리는 잃어가는 마음의 소리를 자극하는 계절의 정취가 묻어난다. 지리산 자락 경남 함양읍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154호 ‘상림(上林)’은 익어가는 가을을 만나기에 적합한 곳이다. 이 아름다운 숲에 지금 깊어가는 가을이 내려와 한창 제 빛을 내뿜고 있다. 상림은 사실 어느 때가 더 아름답다고 말하기 어렵게 각기 제 빛깔로 매혹적인 단장을 한다. 그중에서도 주민들이 가장 애착을 갖는 때가 바로 가을이다. 숲 전체가 붉고 노랗게 물들고, 길에는 두툼한 낙엽이 깔리는 때다. 이 그윽한 숲길은, 아침이면 바로 옆 위천에서 뜸을 들이고 올라온 물안개로 은은히 빛나고, 낮으론 깊숙한 숲길을 넘보는 햇살에 흥건하게 젖는다. 상림은 단순히 아름다운 숲 이상의 가치와 이력을 지니고 있다. 〔〈【덕유산과 지리산 사이 백운산 자락에서 발원한 위천이 함양읍을 가로지른 뒤, 덕유산에서 내려온 남강천을 만나 경호강을 이룬다. 】〉〕상림은 함양읍 대덕동 위천을 따라 폭 80∼200m, 길이 1.5㎞ 가량 펼쳐진 숲이다.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말, 함양 태수로 부임한 고운 최치원이 홍수로 둑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나무를 심어 만든 숲이라고 한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림으로, 본디 대관림(大館林)으로 불렸으나, 숲 가운데쪽이 훼손돼 상림과 하림으로 나뉘게 됐다. 하림은 거의 자취가 사라져, 강변에 선 고목 한두 그루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상림은 나무들이 죽고 나기를 거듭하며 천년 세월을 버텨왔고, 주민들도 이 숲에 깃들어 살며 그 섭리를 따르고 있다. 〔〈【주민들은 언제든 조상의 숨결이 스민 이 숲에 들어, 마음을 열고 숲과 하나가 되곤 한다. 주민들의 기쁨과 슬픔, 희망과 좌절까지 모두 감싸안고 받아들여온 큰 숲이다. 】〉〕여행객들에게도 이 숲은 아주 편안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손잡고 산책하는 노부부, 유모차를 앞세운 부부와 사랑을 키워가는 젊은 연인들, 그리고 나무의자에 걸터앉아 사색을 즐기는 이들까지, 모든 풍경이 여행객 자신의 모습인 듯 낯익다. 요즘 상림에는 월동준비에 나선 나무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색바랜 잎을 털어내고 있다. 울긋불긋 갈색의 나뭇잎이 가히 ‘낙엽비’ 처럼 우수수 떨어진다. 상림 숲에서 만나는 ‘아름다운 단풍’이란, 강렬하고 화려하게 단장한 단풍잎 무리를 일컫지 않는다. 은은하게 물들어가는 울창한 숲과, 가을빛으로 변한 나뭇잎들이 흩날리며 푹신한 낙엽길을 이루는, 가을의 총체적 조화를 말한다.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숲, 상림이 지금 늦가을 바람에 몸을 맡긴 낙엽들로 나날이 아늑해지고 있다. 하염없이 거닐고 싶은 단풍길, 낙엽길이 펼쳐진 곳이다. 날씨가 더 쌀쌀해지면 울긋불긋한 본색은 많이 바래겠지만, 초록에서 노랑, 노랑에서 다갈색으로 차분하게 빛깔을 바꿔가는 참나무류의 이파리들이 가을 햇살에 매혹적인 분위기를 선사한다. 】〉〕이곳에는 서어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 단풍나무, 쭉동백나무 등 100여종에 2만여그루의 아름드리 활엽수가 들어 차 있어 잘 보존된 천연림 못지 않게 빼어난 풍치를 자랑한다. 삼림은 숲 보호를 위해 낙엽을 쓸지 않아 숲전체가 온통 낙엽천지다. 숲 양쪽으로 호젓한 산책코스와 벤치 등 쉼터가 조성돼 있어 낙엽을 밟으며 그리고 떨어지는 낙엽을 맞으며 산책을 하거나 사색에 잠기기 그만이다. 상림 중간 도로변에는 역사인물공원도 조성됐다. 함양에서 태어났거나 인연을 지닌 인물들 흉상이 공원을 지키고 있다. 최치원을 비롯해 김종직, 유호인, 정여창, 박지원 등의 상을 볼 수 있다. 숲 귀퉁이에 있는 이은리 석불(고려시대 불상 추정)도 눈길을 잡아끈다. 상림 낙엽길을 제대로 느끼려면 이른 아침이 좋다. 위천과 숲에 짙은 아침 안개가 내려 앉을 무렵 산책을 시작해 천천히 숲길을 한 바퀴 돌아서는 기분은 가히 선경에 온 듯한 착각마저 든다. 〔〈【아침 햇살이 부시시한 안개 숲을 뚫고 쏟아질 때 숲길의 운치는 영화속의 주인공이 된 듯한 로맨틱 무드의 절정이다. 】〉〕살짝 이슬을 머금은 낙엽과 잎새는 더욱 생기있게 빛나고 마치 부드러운 낙엽 카페트를 걷기라도 하듯 발걸음 마다에 바스락 거리는 소리는 아무리 목석같은 이라 할지라도 한편의 시를 떠올릴 만틈 감성적으로 변한다. 낙엽 수북한 상림 숲길을 걷노라면 코끝을 스치는 싱그러운 숲내음과 이름모를 새들의 지저귐, 숲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개울의 청아한 물소리가 어우러져 마치 세상밖으로 나선 느낌을 갖는다. /최재호기자 lion@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