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고창군 공음면 선동리로 접어들면 논과 밭이 온통 푸른빛으로 펼쳐진다. 학원농장은 17만평. 인근 보리밭까지 합하면 주변의 보리밭은 30만평 정도 된다. 사방을 둘러보면 풍만한 곡선을 그리며 지평선을 이루는 황토 들판이 펼쳐지고 그 황토밭 너머로 청보리밭이 보인다. 초록은 인간의 눈에 가장 부담이 없는 색이라고 한다. 그래서 고창의 초록들판을 보면 마음이 착 가라앉는다. 비록 보리밭이라도 마치 드넓은 초원처럼 보기좋다. 고두심 주연의 영화 ‘엄마’와 아직 개봉하지 않는 ‘웰컴투 동막골’이란 영화도 여기서 찍었다. 발 들이밀 틈 없이 학원농장일대 30여만평을 빽빽이 메운 청보리. 엄동설한에 싹 틔운 뒤 봄볕 아래서 훌적 자란 보리는 6월 황금빛으로 변하기 앞서 초록의 향연을 펼치고 있다. 회색빛 도시에 익숙한 이들에겐 ‘보리바다’ 라는 감탄사가 절도 터질 듯 하다. 어른 허리 높이로 자란 보리들이 살랑거리는 바람결에 누웠다 일어섰다를 반복한다. 푸른 보리 물결이 출렁이면 상념에 찌든 마음이 어느새 맑아진다. 건듯 분 바람결에 청보리의 풋풋한 풀내음이 실려온다. 세련되고, 우아하고, 고상하고 화려한 것이 미덕인 요즘 세상과는 거리가 먼 내음. 그래서 사람들은 이 냄새, 이빛깔에 이렇게 감동하는 것일까. 노송이 몸을 비틀고 서 있는 청보리밭 산등성이 마루. 아담한 토담집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토담집 앞으로 난 보리밭 사잇길. 쉬엄쉬엄 그 길을 걷는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고창 출신 시인 서정주의 시 ‘푸르른 날’의 첫 구절이 저절로 떠오른다. 속삭이듯 되내이고 조금 큰소리로 불러보니 봄나들이 나온 아이들이 옆에서 깔깔거리며 웃는다. 또 한 번 청보리가 바람결에 따라 출렁거린다. 보리밭을 유심히 들여다 보면 마음속에서 녹색 물감이 출렁거리는 것만 같다. 청보리밭. 그저 바라다보기만 해도 가슴 뿌듯한 이 땅의 이 풍경. 인공이란 전혀 느낄 수 없는 자연의 빛깔 그대로인 덕분일 터. 박지훈(51·광양시)씨는 “처음 이곳을 찾았는데 푸르름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다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보리끼리 부딪쳐서 내는 소리가 참 좋다”며“아내 손을 꼭잡고 보리밭 깃을 걸으니 연애할 때 시절이 떠올라 참 많은 이야기들을 했다”고 웃었다. 신나게 보리밭을 밟으며 뛰놀다가 지치면 중간에 마음에 드는 자리를 찾아 쉬면서 보리피리를 불어보자. ‘삐∼익’ 소리가 서툴게 나와도 배우는 아이들. 어른들도 따라해보지만 쉽게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고창군 공음면 청보리밭은 몇해전부터 입소문이 나면서 전국에서 관광버스가 몰려든다. 광활한 보리밭에는 밭고랑 대신 산책로가 놓여있다. 황톳길은 콘크리트 처럼 단단히 다져졌다. 도회지 사람들 뿐만 아니라 시골에서 올라온 농민들도 있다. 60∼70줄 노인들은 허지졌던 보릿고개의 아픈 추억이 떠오른다고 한다. 고창군에서는 지난해부터 ‘고창 청보리밭 축제’를 열고 있다. 보리밭 사잇길 걷기, 보리피리 불기, 보리밥·보리개떡 먹기, 보리방앗간 돌아보기 등을 체험할 수 있다. 농경유물과 생활도구들이 전시되는 가운데 농경과 옛날 생활의 이모저모도 경험할 수 있고, 민속놀이도 즐길 수 있다. 올해는 매점과 식당까지 들어섰다. 지난해엔 경관농업특구로 지정되기도 했다. 김흥신 선동마을 이장은 “지난 8일까지 축제가 끝났지만 청보리밭은 5월 20일께까지 그 푸르름을 만끽할 수 있다”며 “보리밭 산책은 화창한 오후도 좋지만 새벽무렵이나 저녁무렵도 좋아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감상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수평선을 보는 듯한 일망무제의 푸름. 둥실둥실 보리밭을 출렁이는 시원한 바람. 눈부시게 푸른 청보리밭은 일상을 지배하는 ‘빠름과 속도’를 천천히 멈추게 하는 묘한 마력을 지니고 있는 듯 하다. /최재호기자 lion@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