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을 기다리는 이맘때 서정- 곽성구 전 광주일고 교사
2025년 01월 24일(금) 00:00
근심 걱정이란 전혀 없던 시절이었다. 무얼 바라거나 부족함도 치열한 경쟁도 없는 시절이 분명 있었다. 그런 시절은 긴 시간은 아니었다. 그러기에 소중하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그날들이다. 폭설주의보와 함께 한파주의보가 내리는 날이면 내 마음은 휘날리는 눈송이를 따라서 나의 상상력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그 먼 곳으로 데려다 놓는다. 고향 집 마당에도 할아버지 산소에도 눈은 내리고 내 상상력으로는 따라가지 못하는 그 옛날까지 이렇게 데려다 놓는다. 언제인지도 모르게 그 행복한 시절 근심 걱정 없던 시절로 데려다 놓는다.

며칠 전 제 엄마의 품에서 ‘엄마 난 엄마가 좋아’라는 유치원생 손자 녀석의 조용한 고백을 듣는 순간이 새롭게 재생된다. 그 절실한 표현은 어디서 왔을까? 한참 동안을 어린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 속에 내가 들어있었다. 내 어렸을 적 내가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을 이제야 가슴에서 내놓은 것이다. 참으로 꿈속에서 어머니에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이제야 꺼내어 바라보고 있었다.

백설을 따라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백발 소년은 그렇게도 지 어미를 좋아하는 그 소양이 내 무의식의 통로를 타고 전달된 내 유전자라서 그렇다고 단정해야 했다. 나에게서 일렁이는 사랑과 그리움은 어디서 생겼을까? 이맘때면 늘 내 기억을 따라서 옛날로 돌아가는 긴 행로를 즐긴다.

그 시절 어렸을 적 이맘때면 어머니는 엿기름을 기르셨다. 식혜를 만드시고 우리들에게 몇 모금씩만 주시고 엿을 고으셨다. 그때부터 아랫목은 뜨끈뜨끈해 홑이불 하나만 있어도 엉덩이가 뜨거웠다. 엿을 고는 시간은 여간 길어서 달콤한 한 방울을 맛보려고 여러 번 가마솥을 바라보곤 하였다. 긴 시간을 기다리며 침을 삼키고 있는 우리들은 단 수숫대 열매에 묻은 달콤한 엿 방울을 공급받으면 세상의 가장 달콤한 당료 정수를 맛볼 수 있었다. 정월이 지나면 할머니는 잘 보이지 않은 시렁에 올려놓고 대사가 있을 때만 조금씩만 내놓으셨다. 어른들이 들에 나가시고 동생과 둘이 있을 때 동생을 딛고 올라 엿단지에 있는 엿을 손가락으로 묻혀 빨아먹곤 하였다.

또 연 만들기는 아이들의 꿈을 하늘로 날려 보내는 축제요 경기다. 설 한 달 전부터 장날이면 연실을 사달라고 졸라서 어른들을 따라 나선다. 어떤 아이들은 자기 집에서 직접 연실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우리 동네에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가 동네 아이들 연을 거의 만들어 주셨다. 적당한 바람이 부는 시간을 택해서 각자의 연을 푸른 하늘에 날려 보내면 그때 지니고 있었던 모든 소원이 그 연에 실려 창공에 펼쳐진다. 연을 거두어 집으로 돌아와서 그 하늘로 날았던 연을 벽에 걸어두고 잠들면 꿈에서도 높이높이 날았던 그 아름다운 모습이 계속되곤 했다.

설날 가장 설레는 것은 세뱃돈을 받는 기대다. 혼자 합계를 계산하기도 하고 그 세뱃돈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상상해 보는 것은 지금도 설레는 추억이다. 내 경제생활의 터전이 시작된 시작점인 듯하다.

설빔은 새로운 옷을 입을 수 있는 유일한 설날의 기쁨이었다. 내 몸에 적당히 맞는 것이 아니라 일 년 아니 이 년 동안은 입을 수 있는 넉넉한 것을 장만하였다. 그때는 유명 브랜드는 공평한 패션으로 통일되어 누구나 유명 브랜드요 고급 상표였으니 저마다 만족하고 친구의 옷도 구경거리요 자기 옷은 귀중품 중의 귀중품이었다.

눈 내리는 창밖은 소년의 나를 고향 집으로 자꾸만 데려다 놓는다. 왜 그날의 근심 걱정 없던 시절의 눈송이가 아닐까? 나의 욕심이 저 눈송이에까지 실려 있을까? 하염없는 생각이 눈송이를 따라다닌다. 생각해 보니 나의 곁에는 언제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그리고 동네 어른들이 있었지 때문에 행복했던 것이다.

지금도 밖에는 눈이 하염없이 내리고 있다. 그 옛날 근심 걱정 없던 시절로 데려다 놓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는 행복한 마음으로 차례도 준비하고 내 손주들이 그때의 나처럼 기다릴 세뱃돈도 가능하면 많이 준비해야 한다. 많이 주면 더 좋을지를 알지만 주머니가 그리 넉넉하지 못함이 많이 아쉽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이제 어느 새 눈썹까지 하얀 지혜라고는 없는 산신령에 가깝다. 밖에는 폭설주의보가 내리고 한파주의도 내려서 꽁꽁 얼어붙었나 보다. 어린 날 설날을 기다리던 추억은 내 마음 속 따스한 정감으로 흐르고 있다. 겨울의 한 가운데 있는 지금도 그 따스한 설날을 기다리던 겨울 서정이 남아 있음이 세상의 번거로움을 이겨내는 큰 힘이 된다. 설날을 기다리는 이맘때 겨울 서정은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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