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이 가장 아끼는 사물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
2020년 06월 19일(금) 00:00
예술가와 사물들
장석주 지음
소설가 존 스타인백은 유명한 연필 애호가였다. 날마다 여섯시간씩 손에 연필을 쥐고 초고를 쓴 그는 자신이 연필을 손에 쥘 수 있는 동물이라는 사실에 자긍심을 품었다. 그는 마음에 드는 연필을 수십 자루 한꺼번에 구입해 썼는데 ‘블랙윙 602’는 그가 찬탄해 마지 않은 연필이었다. 1998년 602 생산이 중단됐을 때는 ‘뉴요커’ 등이 블랙윙 예찬 기사를 쓸 정도로 불멸의 지위를 얻었다.

1904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 소년 ‘리틀 유’는 낯선 땅에서 성공신화를 쓴 후 한국으로 돌아와 제약회사를 일궈낸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남긴 건 구두 두 켤레, 양복 세 벌이었다. 딸에겐 땅 5천평을 물려주고 아들에겐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자립해 살거라” 유언을 남겼다. 그는 미국을 떠날 때 서재필 박사에게서 선물받은 ‘버드나무 목각화’를 평생 마음에 담는다. 이후 이 목각화는 그의 기업 상표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유한양행 설립자 유일한 박사 이야기다.

휘문고보 시절 야구선수였던 화가 이쾌대에게는 ‘야구배트와 볼’이, 혁명가 체 게바라에게는 네루다의 작품 등 69편의 시를 필사한 ‘녹색 노트’가, 시인 백석에게는 맥고 모자가 평생 우정을 나눈 ‘사물’이었다.

시인이자 에세이스트 장석주가 펴낸 ‘예술가와 사물들’은 예술가들의 생애를 압축하면서 그들의 운명을 만들어낸 계기가 된 사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물 예찬 에세이다. ‘사물과의 우정과 연대’에 대해 마음을 빼앗기곤 하는 저자가 풀어내는 건 ‘사물의 섬광과 아름다움을 취하고 그것을 향한 애착과 함께 제 운명의 도약대로 삼은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사물에 바치는 (頌歌)’다.

‘예술가의 수첩’, ‘시인의 편지’, ‘철학자의 가방’, ‘소설가의 모터사이클’ 4장으로 이뤄진 책에는 130여명 예술가와 사물 이야기가 담겼다. 각각의 글은 두 페이지 분량으로 아주 짧지만 예술가들의 사소한 일상에서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사물들과 어떻게 함께했는지,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책에는 작가, 화가, 가수, 배우 등 다양한 직군의 동서양 예술가들과 우산, LP판, 보청기, 담배, 자전거, 스카프 등 온갖 사물들이 등장한다.

무용가 피나 바우슈에게는 무대를 만드는 데 쏟은 노고를 푸는 데 ‘담배 한 개비’ 만한 게 없었고, ‘사진의 구도자’ 브레송에게 ‘라이카 카메라’가, 권투선수 출신 건축가 안도 다다오에게 헌 책방에서 만난 르 코르뷔지에의 작품집이 최고의 친구였다.

책 말미에 실린 긴 비평문 ‘사물의 시학’에서 저자는 사물을 “날마다 접하는 삶의 조력자인 것, 내면의 필요에 부응하며 말없이 굳건한 것, 절정의 순간에 지는 꽃처럼 덧없고 덧없어서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글마다 글의 내용을 한 눈에 감지할 수 있는 이명호의 일러스트가 담겼다.

<교유서가·1만5000원>

/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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