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후식 칼럼] 성급했던 특사, 일그러진 정의
2019년 02월 20일(수) 00:00
15대 대통령 선거 나흘 뒤인 지난 1997년 12월 22일. 12·12 군사 반란과 5·17 내란, 5·18 유혈 진압, 전직 대통령 비자금 사건으로 수감 중이던 전두환·노태우를 포함한 19명의 인사가 일제히 석방된다. 정부의 특별 사면 덕분이었다. 국민의 5·18 진상 규명 요구와 문민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로 이태 전 구속 수감된 전 씨는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과 상고심에서는 무기 징역에 벌금 2205억 원 추징으로 감형된 상태였다. 항소심 재판부는 전 씨가 재임 중 6·29 선언을 수용한 점을 들어 ‘항장불살’(降將不殺: 항복한 장수는 죽이지 않는다)이라는 고사까지 동원해 형을 한 단계 낮췄다.

이어진 특사는 당시 임기 말이었던 김영삼 대통령이 차기 대선에서 승리한 김대중 당선자의 동의를 얻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명분은 국민 대화합이었다. 여론은 냉담했지만 초유의 ‘외환 위기’ 속에서 대선을 코앞에 둔 정치권은 특사에 적극적이었다. 신한국당은 형 집행이 채 확정되기도 전에 사면론에 군불을 지폈다. 급기야 유력 대선 주자였던 김대중·이회창·이인제 후보는 전·노 사면을 앞다퉈 공약으로 내세웠다.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뻔했던 전 씨는 2년여 만에 출옥해 자유의 몸이 됐다.

당시 전 씨의 특사에는 5·18의 최대 피해자였던 5월 단체와 광주 재야 원로들도 힘을 보탰다. 5·18유족회와 부상자회, 구속자회, 조비오 신부 등은 사면 사흘 전 성명을 통해 “5·18의 올바른 해결을 매듭짓겠다는 의지만 갖고 있다면 전·노의 사면에 동의한다”고 밝혔다.<광주일보 1997년 12월 20일자 23면> 사상 첫 여야 정권 교체를 이뤄 낸 호남 출신 김대중 당선자에게 힘을 실어 주고, 지역 갈등 해소를 위해서는 호남이 대승적으로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분위기도 한몫을 했다. 그것은 일방적 용서이자 화해였다.

물론 반대와 우려가 없었던 건 아니다. 당사자들의 진정한 참회나 사과가 없었고 국민적 사전 합의도 미흡했기 때문이다. 역사의 후퇴이자 사법 정의를 퇴색시키는 조치라는 비판도 거셌다. 그럼에도 ‘조건 없는 사면’은 단행됐다. 다분히 정치적 산물이었다.

전 씨 등의 특사 과정을 지금 다시 되돌아보는 것은 5·18에 대한 끊임없는 왜곡과 허위 사실 유포, 폄훼, 비방이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됐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석방 이후 광주 시민들은 “죄 자체를 용서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라”며 그들의 진솔한 반성과 사죄를 기대했다. 하지만 결과는 딴판이었다. 참회는커녕 과거 판결이나 국회 청문회, 군(軍) 조사 등을 통해 드러난 명백한 사실조차 부정하고 5·18을 능욕하는 궤변을 언죽번죽 쏟아 냈다.

출소 당일 취재진에게 ‘기자 여러분은 교도소에 가지 말라’며 당당한 모습을 과시한 것은 그 전조에 불과했다. 2003년 추징금 관련 재판에서는 ‘전 재산이 29만 원뿐’이라며 뻔뻔스레 납부를 거부했다.(지금까지 환수된 추징금은 전체의 절반 수준인 1155억 원이다.)

급기야 2017년 4월 출간한 회고록에서 ‘5·18은 북한군이 개입한 폭동’이라고 부르대는가 하면 자신이 ‘광주사태 치유를 위한 씻김굿의 제물’이라며 언구럭을 부렸다.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에 대해서는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했다. 국민 통합을 위해 자신의 특별사면을 도와준 조 신부를 비롯한 광주 시민들의 은혜를 원수로 갚고 되레 국론 분열을 획책한 것이다. 전 씨의 부인 이순자 씨는 한술 더 떠 자서전에서 자신들이 5·18의 희생자라고 강변했고, 전 씨를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추켜세우기까지 했다.

이에 5·18 단체와 유가족은 전 씨를 상대로 회고록 출판 및 배포 금지 가처분 신청과 함께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냈고, 광주지법은 모두 원고의 손을 들어주었다. 특히 재판부는 5월 단체가 역사 왜곡이라고 지적한 69개 표현에 대해 허위 사실이라고 판단했다. 지난해 5월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 명예 훼손 혐의로 기소된 전 씨는 재판 관할 이송 신청을 반복하더니 알츠하이머 증세를 이유로 법정에 나오지도 않고 있다. 그는 재판 출석을 거부하던 당시 골프를 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그야말로 후안무치의 전형이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역사뿐이다”(人君所畏者, 史而已)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의 한 대목이다. 재위 12년 동안 두 번의 사화를 일으키고 폭정을 일삼다가 조선 최초의 반정(反正)으로 폐위된 연산군도 사관(史官)들의 평가는 늘 두려워했다고 한다.

전 씨는 역사조차 두렵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너무 두려워 다시 한 번 ‘역사 쿠데타’를 꾀하는 것일까. 신군부 세력은 집권 이후 ‘80위원회’ ‘511대책반’ 등을 만들어 자신들의 죄상을 조직적으로 은폐하고 사실을 조작했다. 발포 명령자 등 핵심 의혹들이 여태껏 규명되지 못한 채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자유한국당 국회의원들과 지만원 씨의 5·18 망언 사태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았지만 사회 곳곳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친일 잔재처럼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오월의 진실을 훼손하려는 극우 세력의 준동은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청산되지 않은 역사는 반복되기 마련이다. 비극적 미래를 막으려면 조만간 출범할 5·18 진상 규명 조사위원회의 활동에 기대를 거는 수밖에 없다. 쉽지는 않겠지만 발포 명령자와 계엄군의 성범죄 등에 대한 치밀한 재조사를 통해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국가의 공인 보고서를 내놓아야 한다. 아울러 5·18 왜곡 행위를 범죄로 규정해 처벌하고 가짜 뉴스가 유통되지 못하도록 법률 제정도 서둘러야겠다.

전 씨의 잇단 재판 불출석에 광주지법은 구인장을 발부했다. 다음달 11일 광주 법정에 서야 하는 전 씨는 내란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은 지 24년 만에 다시 법의 심판대에 오르는 것이다. 이제 스스로 진실을 털어놓고 용서를 구하는 것만이 최선의 길이다. 하지만 이를 기대하기는 심히 어려우니 법으로써 단죄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이 땅에 정의가 살아 있음을 확인시켜 주어야 한다. 법과 역사를 시험하는 자에게는 법과 역사의 심판이 얼마나 엄중한가를 보여 주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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