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스포츠/연예
오피니언
기획시리즈
사설
칼럼
이홍재칼럼
기자노트

[이홍재의 세상만사] 이제 그런 일은 또 없겠지

2018. 09.21. 00:00:00

엊그제 봤을 땐 꽃대들만 덜렁 솟아 있었던 것 같다. 한데 하룻밤 사이에 어찌 저리도 곱게 피어난 것일까. 출퇴근길, 화사한 꽃무릇이 금파공고 담장을 따라 나지막한 언덕을 온통 빨갛게 물들였다. 꽃이라고 어찌 귀가 없을까. 저들도 아마 남북 정상이 얼싸안고 70년 적대 관계를 완전 청산한다는 소식을 들었던 게지. 두 정상이 손을 마주잡고 백두산 천지에 오른다는 소식도 들었던 게지. 그러지 않고서야 하필이면 그날, 정상회담이 열리던 날에 그렇게 일제히 꽃을 피워 올렸겠나.
수십 개의 팔을 벌렸다가 끄트머리에서 다시 동그랗게 오므려 마치 성화(聖火)인 양 빨간 꽃을 피워 올린 저 꽃무릇. 저들도 텔레비전을 통해 학교 담장 밖으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겠지. 그리하여 너무도 기쁜 나머지 탄성을 지르며 일제히 피어났겠지. 저들이라 해서 사실상의 남북 간 불가침협약으로 전쟁 공포가 사라진다는데 어찌 기쁘지 않았겠나.
참 감동적이었어. 텔레비전 생중계를 지켜보며 한때 가슴을 졸이기도 했지. 그러나 모든 게 잘됐어. 마치 ‘다정한 연인’처럼 얘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벅찬 감동이 물밀듯이 밀려온 거야.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 말들도 우리의 가슴을 뛰게 했어. 가령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이런 말들. “불신과 대결의 늪 속에서 과감히 벗어나 이제는 그 누구도 멈출 수 없는 민족 화해와 평화·번영의 새 시대로 당당히 들어섰습니다.“ 여기에 문재인 대통령의 화답은 또 어떤가. “남북 정상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든지 편하게 만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남북 간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맞아. 이런 날이 오리라고 누군들 상상이나 했을까.
사실 끊임없이 반공 교육을 받고 자란 우리는, 북한엔 거지들 아니면 괴물처럼 생긴 빨갱이들만 사는 걸로 생각했던 적이 있었지. 그것은 매우 기나긴 세월이었어. 소설가 황석영이 북한에 들어갔다 나온 뒤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제목의 글(정확한 제목은 생각나지 않지만)을 썼을 때에야, 우리는 그곳에도 우리와 생김새가 같은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비로소 알 수 있었고.
그러고 보니 이런 일이 생각나네. 30여 년 전 북한 사람을 처음으로 근거리에서 보았던 일. 그땐 우리와 수교하기 전인데 어쩌다 중국에 갈 기회가 있었거든. 북경의 길거리에서 김일성 배지를 가슴에 단 사람을 마주치게 됐는데 왠지 가슴이 철렁하더라고. 그 순간 어째서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일까. 아마도 북한 사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은 정보기관 사람이 더 두려웠겠지. 그래 인사 한 번 나눠 보지 못하고 그저 슬슬 피해야 했으니. 남북 평화가 무르익고 있는 지금, 이제 그런 일은 또 없겠지.
멈출 수 없는 평화의 시대
이후 북한 사람을 다시 본 것은 수년 전 금강산에 갔을 때였다. 그들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가슴 한 구석에 남아 있었지만 그 두께는 상당히 엷어졌던 모양이야. 숙소 근처에서 김일성 동상 보수 공사를 하는 북한 주민들에게 아주 가까이 다가가 보기도 했으니까. 약간은 떨리는 마음을 안고 그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 보기도 했어. 물론 북한 인부들의 완강한 만류에 사진 찍는 일은 실패하고 말았지만. 이제 남북이 하나가 되는 날이 오면 그런 일은 또 없겠지. 사진 한 장 찍지 못하고 돌아서는 일은 없겠지.
잠시 지난날을 돌아보면, 북한 정권이 있어 박정희 정권이 공생할 수 있었고 박정희가 있어 국가보안법이 있었다.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수많은 민주 투사들이 고문받고 투옥되고, 때로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도 했다. 우리가 조금 잘살게 됐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희생은 어디에서 어떻게 보상받나. 오래전 얘기지만 ‘북한산 명태가 맛있다’고 말한 어부가 정보기관에 끌려갔다던가.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 민주적 기본 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선동·동조함으로써 성립하는 죄’. 바로 국가보안법 제7조에 규정되어 있는 ‘찬양고무죄’다. 하긴 정보기관 사람들은 북한산 고기도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이라 여겼던 것일까.
사실 여부야 알 수 없지만 이런 얘기도 들은 적이 있다. 수십 년 전인데, 어느 역장이 직원들을 모아 놓고 훈시를 하면서 ‘김일성이만도 못한 놈들’ 이란 말을 했단다. 한데 아래 직원이 ‘김일성을 찬양했다’며 곧바로 정보기관에 신고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역장은 구속됐다는데, 지금 젊은 사람들은 못 믿겠지만 나는 이게 당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김정은 위원장의 말처럼 ‘멈출 수 없는 평화의 시대’가 되면 이제 앞으로 그런 일, 또다시 일어나진 않겠지.
판문점의 봄 평양의 가을
첫 정상회담 당시 두 정상의 도보다리 대화는 아직도 뇌리에 깊이 남아 있다. 그때 그 장면은 ‘그 모습만으로도 전 세계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한가롭게 지저귀는 새 소리를 배경 음악으로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웃으면서 주고받는 이들의 대화를 보면서, 사람들은 한 편의 ‘무성영화’를 보는 듯했다고 평하기도 했는데. 앞으로도 그런 감동이 계속해서 쭉 이어졌으면 좋겠다.
다들 보고 듣고 했을 테니 이번 정상회담의 내용과 성과를 여기에서 다 열거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김정은 위원장이 비핵화에 대해 처음 육성으로 언급한 일만은 짚고 넘어 가야겠다. 왜냐면 자유한국당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주 의원들을 향해 (비핵화 부분에 대해) “직접적으로 김정은의 육성으로 들은 적이 있느냐”며 강한 불신을 나타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김 위원장의 육성이 나왔으니 저들 야당은 머쓱해질 만도 한데, 아직도 트집 잡기에 여념이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국방부 시계가 돌아가듯이 한반도 평화의 시계는 돌아갈 것이다.
참 잘됐다. 백두산 천지에서 우리 대통령 내외가 생수병에 물을 담는 모습도 보기에 아주 좋았다. 김정은 위원장이 연내에 서울을 방문한다니 이 또한 좋은 일이다. 정상들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가 남북을 자유롭게 왕래하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한평생 마주보지 못한 채 잎은 꽃을 그리워하고 꽃은 잎을 그리워하는 꽃무릇처럼, 우리도 남북으로 갈라진 채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고 살아온 세월 어언 몇 년이던가. ‘판문점의 봄’에 뿌린 씨앗이 이제 ‘평양의 가을’에서 알찬 열매로 영글고 있으니, 상사화처럼 보고 싶어도 그저 가슴속에 담아 두고 꾹꾹 참아야만 하는 그런 일, 이제는 또 없어야겠지.
/주필

기사 목록

검색